명인 · 고전사

천자문(千字文)의 유래(由來)

청정지역 2017. 12. 19. 19:55


  천자문(千字文)의 유래(由來)  

우리가 한자를 배우면서 가장 먼저 배우는 ‘습자교본(習字敎本)’으로 이용되는 것이 천자문(千字文)이다. 그런데 정작 천자문은 처음에 한자를 배우는 사람은 물론 한자를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당연히 한자를 처음 배우는 초심자들이 쉽게 이해하여서 배울 수 있는 습자본으로 만들어 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현재의 초보자가 배우는 천자문은 초학자를 배우는 사람들을 위해 지은 책이 아니기 때문에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왜 그렇게 만들어졌을까? 그 이유에 대하여 천자문의 구조와 내용부터 천천히 살펴보도록 하자.

구양순의 천자문(千字文)이란?

천자문은 중국 남조(南朝)시대에 양(梁)나라의 주흥사(周興嗣:470∼521)가 지은 글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천자문을 보고서 첫 느낌으로 한자를 배우는 초보들이 배우는 것인데 왜 이리 어려울까? 초보자야 그렇다고 쳐도 한자를 좀 배웠다하는 사람들도 느끼는 감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왜 초보자용 천자문이 왜 이토록 어렵게 느껴질까?

남조의 양무제(梁武帝) 소연(?衍)은 학문을 좋아하고 여러 학문에 통달하였다 하며 문학을 즐긴 인물이다.《상전(相傳)》에 의하면 양무제는 일생동안 전란이 그칠 새 없던 시대를 살던 인물이었으나 그는 이러한 평가를 듣기보다는 태평성대가 지속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싶어 하던 인물이었다. 그는 서법을 좋아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가 쓴 초서의 서법을 매우 좋아해 숭배한다고 전한다.

그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왕희지의 초서를 익히게 하기 위해 우선 은철석(殷?石)이라는 시종을 시켜 진대서법가인 왕희지의 필적이 있는 비문에서 탁본을 뜨게 한 다음에 필적 중에서 1천개의 다른 글자를 뽑아내어 이를 종이 한 장에 한 글자씩을 쓰도록 하여서 가르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양무제는 이들 글자들이 난삽하여 기억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어려운 점을 생각하여 이를 기억하기 쉽게 만들기로 작정하였다. 양무제는 한자씩 외우다 보니암기할 수가 없어서 천자의 글자를 한 편의 문장으로 만들어서 편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여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문학시종원 산기시랑(散?侍?)이란 벼슬을 하던 주흥사(周?嗣)를 불러오도록 하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고는 통속적이고 이해하기 쉽도록 4언고시로 (四言古詩) 250구(句), 합해 1,000자의 각각 다른 글자로 된 글을 짓도록 하였다.

주흥사(周?嗣)는 임무를 부여받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밤을 새워가며 고심하였다. 그러자 어느 순간에 머릿속에서 글과 생각이 샘에서 물이 솟아 나오듯 떠올랐다. 그는 이를 읊조려 가면서 글씨를 써 나갔다. 마침내 일천자를 꿰어 내용이 풍부한 4언고시를 완성해 낼 수 있었다. 양무제는 이를 읽은 후 탁자를 치며, “훌륭하다”, “당장 이를 가져가서 인쇄하도록 하라” 고 명령하였다.

주흥사는 양무제의 칭찬을 들은 후《천자문》을 편찬하였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서 비단 등을 하사받고 좌선국사(佐撰?史)로 선발되었다. 그러나 주흥사는 하루 밤사이에 천자문을 지어내느라고 얼마나 고심 하였던지 머리가 완전히 백발이 되었다고 전한다.(次日, 已??皆白). 이러한 유래에 따라서 《천자문》을 백수문(白首文)이라고도 한다.

명대 고문의 대가 왕세정(王世?)은 이 책을 칭찬하여 절묘한 문장(?妙文章)이라고 하였고, 청의 저인획(?人?)은 이를 칭찬하여 “한정된 글자속에서 이를 조리있게 잘 꿰어서 한 터럭의 오차도 없이 한 치의 나무위에서 무지개빛 치마를 입고 춤추는 것 같고, 어지럽게 얽혀진 실에서 실마리를 찾아낸 것 같다”(局于有限之字而能?理?穿,毫无舛?,如舞霓裳于寸木,抽??于??)하였다.

주홍사는 글자들을 교묘히 배치하여《천자문(千字文)》을 완성하였는데 천문, 자연, 수신, 인륜도덕, 지리, 역사, 농경, 제사, 원예, 음식 논리, 교육 등 다양한 내용으로 만들었다. 주흥사가 초서체로 만든《천자문》은 초서를 익히는 학습의 기본교재로 많이 활용되었다. 당나라 때의 승려 서예가인 ‘희소(懷素)’ 는 이러한《천자문》을 800번이나 임서(臨書 : 글씨본을 보면서 글씨를 씀, 또는 그 글씨)하여 솜씨를 익혔다고 하여 알려지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천자문》은 이처럼 초서를 익히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교재를 만들다가 보니 많이 알려져서 어린아이들이 처음 글자를 익히는 교재로 쓰이기는 하나 적당하지가 않은 것이다. 우선 개념이 들죽 날죽하고 문장의 구조도 왔다 갔다 하면서 처음에 역사이야기를 하다 갑자기 몸가짐 이야기로 뛰는가 하면 일관성도 결여되어 있다. 물론 양무제가 자신의 자식들이 배우기 쉽게 이해하기에 좋도록 만들기는 하였다. 그러나 천자문은 1천개의 주어진 글자만을 사용하여 만들라는 제약속에서 꿰어 맞추어진 ‘퍼즐퀴즈’ 된 글자이다가 보니 초보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만든 글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점을 들어서 다산 정약용도 《천자문》을 비판하고 있다.

다산은 “하늘은 검지 않고 누른데 검다고 하였고 검다고 하여 의미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고 하였다. 《천자문》은 자학(字學)에 관한 학문이 아니며 정보를 체계적으로 전달하지 못하고 뒤죽박죽으로 네 글자씩 운자에 맞추어 배열한 결과 이 책은 전혀 계통이 없고 체계도 없는 책이 되었다.

다산 정약용은 이러한 이유를 들어서 초보자들이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2천자문인《아학편(兒學編)》을 지어 가르쳤는데 이 책은《천자문》의 아동의 발달과정과 인지과정을 완전히 무시하였다면서 상권 1천자는 유형지물(有形之物) 즉 명사를 유별로 모았고, 하권 1천자는 물정(物情)과 사정(事情) 즉 형상이 없는 개념어나 동사·형용사를 갈래 나눠 제시하였다.

천자문은 994개의 글자로 만들어졌다.

그런데《천자문》은 실제 이름과는 달리 994개로 이루어졌고 6개는 중복된 글자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래는 중복된 글자의 보기이다.

        

  《천자문》의 종류  

《천자문》이 비록 이해하기 어렵게 만들어졌지만 습자용책으로 중국에서 지금까지(우리나라경우에는 조선말까지) 《천자문》보다 더 애용되었던 교과서는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당나라 이후에 급격히 보급되어 많은 서가(書家)에 의하여 쓰여 졌으며 그 중에서 습자교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 지영(智永)이 진서(眞書:楷書)와 초서(草書)의 두 체로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본으로 1109년에 새긴 석각(石刻)이 전하고 있다.

그리고 송대(宋代) 이후에도 점차 이용범위가 확대되어 문서나 책을 만들 때 《천자문》순서를 이용하여 번호를 붙이는 습관도 생겼으며, 이어《속천자문》이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천자문》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많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변화를 겪어 전연 딴 글자를 뽑아서《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이라 이름붙인 것도 나왔다.

《천자문》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때는 확실치 않으나 백제 때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10권과 함께 이 책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을 볼 때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는 한문의 입문서로서 초보자에게는 필수의 교과서로서 중용(重用)되었고 현재 선조 때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석봉천자문》은 유명하고 많이 이용되고 있다.


  ▲ 왕희지가 쓴 난정서(蘭亭敍)  

천자문의 유래 주흥사가 지은 4자 250구의 장편시. 한문(漢文) 초학자를 위한 교과서 겸 습자교본. [解義] 중국 南朝(남조)의 梁(양)나라에 周興嗣(주흥사, 468-521)라는 가난한 선비가 있었다. 공부는 많이 했지만 도무지 등용되지 않았다. 그러기를 몇 년, 糊口之策(호구지책)으로 책을 수선해 주기로 했다. 落張(낙장)내용을 복원해 주어야 하기 때문에 여간 박식하지 않고서는 엄두도 못내는 일이었다. 그래서 修補殘書(수보잔서, 해진 책을 복원해 줍니다.)라고 큼직하게 몇 자 써 가지고 무작정 집을 나섰다.

하루는 어떤 이가 신기한 나머지 누더기 같이 해진 책을 가지고 나와 복원시켰다. 그는 즉석에서 복원해 주었다. 물론 원서와는 한자도 틀리지 않았다. 그 소문은 금방 장안에 퍼져 마침내 천자의 귀에까지 들리게 됐다. 천자는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일부러 서가에서 좀먹은 책 한 권을 뽑아 복원시켰다. "이 책은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요약해 드릴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翰林院(한림원)에 기거하면서 복원해 보도록 하시오." 며칠이 지나 4자 2백 50구의 장편시를 바치면서 千字文(천자문)이라 이름 붙였다. 정형시에다 완벽한 내용에 천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당장 관직을 내려 그를 등용했다. 천자문의 유래다. 一說(일설)에 의하면 그동안 너무 고심한 나머지 온통 머리가 다 셌다해 천자문을 일명 白首文(백수문)이라고도 한다.

내용은 ‘천지현황(天地玄黃)’에서 시작하여 ‘언재호야(焉哉乎也)’로 끝난다. 당나라 이후 급격히 보급되어 많은 서가(書家)에 의하여 쓰여졌으며 그 중에서도 습자교본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왕희지의 7대손 지영(智永)이 진서(眞書:楷書)와 초서(草書)의 두 체로 쓴 《진초천자문(眞草千字文)》본으로 1109년에 새긴 석각(石刻)이 전하고 있다. 송대(宋代) 이후 이용범위가 점점 확대되어 《천자문》의 순서를 이용하여 문서 등의 번호를 붙이는 습관도 생기고 또 《속천자문》이 나오는가 하면 전연 딴 글자를 뽑아 《서고천자문(敍古千字文)》이라 이름붙인 종류도 많이 나왔다.

이 책이 한국에 전해진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백제 때 왕인(王仁)이 《논어(論語)》 10권과 함께 이 책 1권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훨씬 전에 들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한문의 입문서로서 초보자에게는 필수의 교과서로 중용(重用)되었으며 선조 때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쓴 《석봉천자문》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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