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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아들 안중근의사에게 쓴 마지막 편지

청정지역 2019. 3. 1. 20:22





오늘은 3.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100년이 되는 날입니다

오늘 독립운동가 중에서 안중근 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겠지만


안중근의사의 그 훌륭한 기백 뒤에는

그이 어머니 가 있었습니다






그녀 조마리아(본명 조성녀, ? ~ 1927년)는
안중근의 어머니이자 독립운동가입니다

.
백천 조씨이며.

아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제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자


항소하지 말라고
권했다는 일화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안중근 어머니의 편지 


안중근 어머니의 편지
아들이 결국 처형된 뒤
중국 상하이에서 당시 임시정부
인사들에게 여러가지로 도움을 주며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불렸으며

.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8월 조마리아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했죠




어머니 조마리아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고 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에게 간결하면서도

단호한 편지를 보냈죠.


안중근 의사(義士) 



 

네가 만약 늙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 생각한다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것은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딴 맘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다.

 



아마도 이 편지가 이 어미가

너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가

될 것이다.

 

여기에 너의 수의(壽衣)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



어미는 현세에서

너와 재회하기를 기대치 않으니

 

다음 세상에는 반드시

선량한 천부의 아들이 되어

이 세상에 나오너라


  '안중근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중근에게 쓴 마지막 편지



 안중근 의사의 생전 모습



1910년 2월14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혐의를 받는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됐다.


이 소식은 국내에 머물던

어머니 조마리아게도 전해졌다.

조마리아는 안중근의 두 동생

정근과 공근을 급파했다.


두 사람의 손에는 어머니가

장남에게 전하는 편지가 들려있었다.

편지를 꺼내 읽은 안중근은 이내 충격에 빠진다.


 "네가 나라를 위해 이에 이른즉

다른 마음 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곧 죽게 될 아들에게 조마리아가 한 말은


 "그립다", "보고싶다"가 아니라

"죽으라"는 것이었다.

 '대의에 죽어서 나라를 살릴 것'을

당부하는 어머니의 결기에 항소를 고민했던

안중근은 곧장 마음을 바꿔먹었다.


죽음 앞에서 잠시나마 약해질 뻔했던

 마음은 오히려 더욱 단단해졌다.


어머니의 편지를 읽은 안중근은 동생들과의

짧은 면회를 마치고 되려 편안한 표정으로

감옥소로 돌아갔다.

그렇게 안중근은 '항소 포기'로 마음을 굳혔다.


이 말은

아마도 우리 독립운동 역사를 통틀어

가장 뜨겁고도 슬픈 한 마디일 것이다.


어떤 어미가 아들에게

죽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조마리아는 안중근에게 그렇게 했다.



훗날 안중근의 순국은 물론 조마리아의

이같은 기개가 독립운동가들에게는

 물론 일반 시민들에게도 전해지면서


1919년 '3·1운동' 등 독립을 향한

염원으로 이어졌다고 본다면 이또한

독립운동이라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1909년 10월26일

안중근의 하얼빈 거사(巨事) 이후

일제는 조마리아는 물론

안중근의 동생 정근과 공근도 심문했고,


두 동생은 한 달 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조마리아와 그 가족은

 혐의점이 없었기에 풀려났지만,

일제는 '아들 교육을 잘못 시켰다'는

이유로 집요하게

조마리아를 괴롭힌 것으로 전해진다.


 이때 조마리아는

일제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내 아들이 나라 밖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내 알 바 아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국민으로 태어나

나라의 일로 죽는 것은 국민 된 의무이다.


내 아들이 나라를 위해 죽는다면

나 역시 아들을 따라 죽을 따름이다."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후

약 4개월이 지난 1910년 2월14일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열린

안중근에 대한 1심 선고심에서 사형이 떨어졌다.


조마리아는 분노했다.

 "이토가 많은 한국인을 죽였으니,


이토 한 사람을 죽인 것이 무슨 죄냐,

일본 재판소가 외국인 변호사를

거절한 것은 무지의 극치이다."


조마리아는 정근과 공근을 뤼순으로 급파해

'항소를 포기하라'는 내용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일제는 당시 안중근의

변호인 선임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당시 안중근 변호인을 자처한

러시아·영국인 변호사가 있었지만,


 안중근은 한국인 변호사가

자신의 변호를 맡기를 원했다.


조마리아는 평양으로 가 독립운동가인

안병찬 변호사에게 아들의 변호를 요청했고,

 안병찬이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제는 일본 형법으로

일본 법정으로 진행되는 재판에 일본인 외에

외국인 변호사는 선임할 수 없다며

안중근의 변호인 선임을 방해했다.


이에 안중근의 변호는 일본 관선 변호인

미즈노 기치타로 등 2명이 맡게 된다.



안중근과 조마리아의 일화는

당시 언론에 의해서도 회자됐다.


국내 '대한매일신문'과

일제 '아사히신문' 등은 두 사람 관련

소식을 싣고 '시모시자'(是母是子)라고 했다.


 '그 어머니에 그 아들.'

이 이야기는 일본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뤼순 고등법원장 히라이시 요시토는

수감된 안중근을 찾아가

항소할 것을 권했으나 거절했다.


변호사 기치타로 또한 감형받아보자고

설득했으나 안중근은 거부했다.


 "나는 처음부터 무죄요, 무죄인 나에게

감형을 운운하는 것은 치욕이다"라는 게

 안중근의 답변이었다.



안중근의 간수였던 치바 사토시라는

인물 또한 안중근과 조마리아 일화에

탄복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사학자인 박옥윤 전 성신여대 명예교수가

'한국여성독립운동가'에 쓴

'안중근의사 어머니 조마리아의 항일구국적 생애'에는

사토시가 모자의 언행에

감동받아 안중근에게 평생 사과하며

살기로 결심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사토시는 눈을 감기 전 안중근이 보인 결기는

상당 부분 어머니의 '항소 포기 발언'과

관련이 있다고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4분, 안중근은 절명했다.

조마리아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면회가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죽음을 앞둔 아들의 얼굴을 도저히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던 걸로 풀이된다.


조마리아는 사형 집행 전날 정근과

공근을 다시 뤼순으로 보냈다.

그들의 손에는 조마리아가 보낸

명주실로 짠 하얀 수의(囚衣)가 들려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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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어서는 안될 독립운동가의 고귀한 어록


독립운동가의 말씀



3.1절을 앞두고 우리민족의 영웅이신

그 분들의 말씀을 감히 올려봅니다.





나는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가장 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부(富)력이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강(强)력이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 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선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눈길을 걸어 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가 되리니.



 ㅡ 백범 김구 ㅡ







**나를 죄인 취급하지 말아라.

이토를 죽인 것은 나 일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평화를 위한 것이다.



나는 독립군의 중장자격으로

이토를 살해했다. 나는 군인이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옆에 묻어 두었다가

나라를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마땅히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힘쓸 것이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나는 국민의 의무로서

내 몸을 희생하여

어진 일을 이루고자 했을 뿐이다.



 내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한

바이니 죽어도 여한이 없노라.



ㅡ 도마 안중근 ㅡ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ㅡ매헌 윤봉길ㅡ





​저는 이번 일로 확실히 알았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맨손뿐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겁내어

총과 칼로 법석을 떨었습니다.



여러분, 조신의 해방이

눈앞에 다가왔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다 함께 일어나십시오.

 하느님도 우리를 도우실 것입니다



나는 대한사람이다, 나라를 위해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도 죄가 되느냐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나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수 있사옵니다.



그러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ㅡ 유 관 순ㅡ





 백범 김구 선생님께

제 나이 이제 서른 하나입니다.



앞으로 서른 한 해를 더 산다 해도

지금보다 더 나은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지난 31년 동안 쾌락이란 것을

모두 맛보았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한 쾌락을 위해 목숨을

바칠 각오로 상하이로 온 것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聖業)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나는 적성(赤誠)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나의 생명을

 빼앗지마는 국가를 위한

 나의 충성된 혼과 의로운 혼백은

가히 빼앗지 못할 것이니,



한 번 죽음은 아깝지 아니 하거니와

 생전에 이룩하지 못한 한(恨)을 기어이

설욕(雪辱) 신장(伸張)하리라 (최후 진술)


 ㅡ이 봉 창ㅡ





 공범이 있다면 2천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


나의 생명은 빼앗더라도

나의 충성된 혼은 빼앗지 못한다.


 ㅡ 이 재 명 ㅡ





나는 밥을 먹어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 잠을 자도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해왔다.



 이것은 내 목숨이 없어질 때까지

변함이 없을 것이다.



진실은 반드시 따르는 자가 있고,

정의는 반드시 이루는 날이 있다.



낙망은 청년의 죽음이요,

청년이 죽으면 민족이 죽는다.



ㅡ도산 안창호ㅡ


꼬부기가 몇번을 읽어 봤지만

그때마다 가슴이 뭉쿨해지고

본 받고 싶어 집니다.


오늘 하루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이 팩트를 많은 분과 공유하세요

독립운동가들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번영의 삶을 누리는 것 입니다


- 거북이 -





 

 

우리 어머니

(오문옥 작시, 이안삼 작곡, 지휘 임명운) / 아주여성합창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