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화 -애꾸가 내일을 보다
흉년이 들면 농사꾼들은
피가 바짝바짝 마르지만 천석꾼 부자
황 첨지는 빙긋이 웃는다.
지난해는 지독한 가뭄으로
보리는 싹도 나지 않았고
콩은 겨우 난 싹이 메말라 고개를 꺾었다.
논은 거북 등처럼 갈라져
모가 하얗게 쪼그라 들었다.
황 첨지네 논밭이라고
비가 뿌렸을 턱이 없지만
그는 희희낙락했다.
그 전해에 추수해놓은 보리섬,
콩섬, 나락가마가 곳간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러나 황 첨지는 곡식을
내다 팔지 않아도 큰 횡재수가
줄줄이 엮여 들어온다.
보릿고개까지 갈 것도 없이
동짓달에 벌써 양식이 떨어진 집이
속출하면 황 첨지는
비싼 장리쌀을 놓는다.
집집이 우선 굶어 죽지 않으려고
천수답이며 밭뙈기를 담보로
황 첨지한테서 곡식을 빌려다 먹으면
십중팔구 그 논밭은
황 첨지에게 넘어간다.
황 첨지는 장사에도 밝아
새우젓 배를 통째로 샀다가
새우젓이 달릴 때 야금야금
내놓아 폭리를 취하기도 한다.
또 누구에게든 안하무인이다.
뒷짐을 지고 저잣거리를 휘젓고 다니며
손윗 사람에게도 하대를 하고
여염집 부녀자도 하녀 취급한다.
그가 고개를 숙이는 단 한사람은
손아래 반미치광이 백가다.
백가는 허구한 날
술에 취해 부녀자들 이목도 두려워 않고
노상방뇨를 하고
주막에서 외상술 안 준다고
독을 깨고 평상을 뒤엎는다.
그 뒷수습은
언제나 황 첨지가 한다.
아이들도 돌팔매를 던지는
개차반 백가를 황 첨지는 백 대사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모신다.
백가는 생김새도 볼품이 없었다.
덩치도 쪼끄마한 데다 애꾸눈엔
안대를 차고 박박 얽은 곰보에
염소수염을 달고 쭈그렁
갓에 두루마기에는 땟국물이 흐른다.
단 하나
성한 곳은 남은 눈이다.
쏘아보는
눈빛엔 광채가 빛난다.
그에게 남다른 예지력이
있다는 걸 눈치챈 사람이 황 첨지다.
어느 날
황 첨지네 드넓은 마당에서 타작이
한창인데 백가가 나타나
막걸리 한잔을 얻어 마시더니
타작을 멈추고
마무리를 하라고 고래고래 고함쳤다.
곧 폭우가 쏟아진다는 것이었다.
“구름 한점 없는
이 화창한 가을날에 폭우라니,
백가 네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한잔 얻어 마셨으면 빨리 꺼져라.”
황 첨지가 백가를 쫓아내고 나자
산 너머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폭우가 쏟아져 동네
개울이 나락으로 꽉 찼다.
모두가 떠내려가는
나락을 막느라 야단인데 멍하니
서 있던 황 첨지는
대문 밖으로 달려 나가
아랫동네 길가 집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 백가에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큰절을 올렸다.
“대사님,
소인의 무례함을 용서해주십시오.”
백가는 재밌다는 듯이 낄낄 웃어댔다.
황 첨지가 새우젓을 매점매석하여
큰 이문을 남긴 것도 백가의 귀띔이고,
지난 가을에
소금을 천가마나 사놓았다가 봄에
곱절에 판 것도 백가 덕이고,
안동포를
싹쓸이했다가 떼돈을 번 것도
백가의 앞날을 보는 눈 덕택이었다.
돈에 눈이 먼 황 첨지와
한쪽 눈이 먼 백가놈이 한통속이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 좋은 글 우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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