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야담) 목숨을 나누는 친구

청정지역 2015. 7. 18. 08:12

 


 ▶ 목숨을 나누는 친구

점잖은 선비 박진사의 늦게 본 외아들 박술은 머리는 총명하나
못된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데 정신이 팔려 공부는 뒷전이다. 
어릴 땐 닭서리, 수박서리로 동네의 골칫거리더니 열댓살이 되자
곳간에서 쌀을 퍼내 팔아서 색주집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어느 날 박진사는 아들을 불러 앉혀놓고
“너는 어찌하여 의롭지 못한 친구들과 어울려…”
박진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님, 유비·관우·장비가 도원결의를 맺은 것처럼 우리도
의형제를 맺어 목숨을 바쳐 서로 돕기로 한 좋은 친구들이에요.”

어느 날 밤,
곤하게 자고 있는 박술의 방에 박진사가 살며시 들어왔다.
“아버님 이 밤중에 어인 일이십니까?”
“쉿! 초저녁에 길 가던 선비가 하룻밤 묵어가기를 청해
우리 사랑방에 들어온 건 너도 봤지?”
“네.”
“그 선비와 맹자를 논하다가 언쟁이 붙어 목침을 던졌더니 그만…”
“주, 주, 죽었단 말입니까?”
청천벽력같은 박진사의 고백에 사랑방으로 가본 박술은 이불을
덮어씌워놓은 선비의 시체를 보고 얼어붙어 버렸다.


부자는 하인들 몰래 거적으로 시체를
말아서 박술이 그걸 짊어지고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아버님 걱정마세요.
봉출이네 헛간에 숨겨뒀다가 비 오는 날
친구들과 산에 묻어버릴게요.”
봉출이네 집 앞에 가 박술이 살짝이
봉출이를 불러내 자초지종
얘기를 했더니 목숨을 나눌
의형제라던 그는 “야! 너는 물귀신이냐.
살인사건에 왜 나를 끌어넣으려 해"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다시 발길을 돌려 만석이한테 찾아갔지만 그도 마찬가지였다.
“썩 꺼져 임마. 나보고 시체 유기를 하라고!”
굳게 닫힌 만석이네 대문 앞에서 박술은 분노의 눈물을 떨구었다.

박진사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할 수 없다. 내 친구 집으로 가보자.”
박진사가 앞서고 시체를 짊어진 박술이 뒤따라
솔개골 박진사의 친구인 이초시 집으로 갔다.
“이 밤중에 어인 일인가?” 이초시가 놀라서 물었다.
박진사는 나그네 선비를 살인하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이초시는 제 일처럼 “이 사람아 얼마나 놀랐겠나.
일단 우리 집 거름더미 속에 묻어뒀다가 다음 일을 궁리해보세.”
이초시가 삽을 들고 와 거름더미를 파려고 할 때

박진사 왈 “선비님 이제 그만 일어나시지요.”
거적에 쌓인 시체(?)가 일어났다.
이초시가 술상을 마련해오며 박진사에게
“야 이 사람아, 사람을 이렇게 속이는 법이 어디 있나.”
“미안하이.”
나그네 선비는 “두분의 우정이 부럽기만 합니다.”
세사람은 껄껄 웃으며 날이 새는 줄도 모른 채 술잔을 나누고
뒷전에 앉은 박술은 쏟아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튿날부터 박술은 친구들을 끊고 이를 악물고 공부해
3년 후에 과거에 급제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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