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올가을엔 전철타고 여주 탐방

청정지역 2016. 10. 5.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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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종대왕 상


    ♣ 올가을엔 전철타고 여주로 여행가자 ♣ 경기도 성남~광주~이천~여주를 잇는 복선전철이 지난달 24일 개통되었어요 총연장 57㎞의 이 복선전철은 성남시에서 이천시까지는 30분, 여주시까지는 45분이 소요되지요 이번에 개통된 복선전철은 ‘경강선’이라 이름을 붙었어요 앞으로 2023년도까지 △판교~월곶 △이천~충주~문경 △여주~원주 △원주~강릉 등의 노선과 연계될 계획이기 때문이지요 기본요금 1250원에 수도권통합요금제를 적용하는데 경강선은 판교~이매~삼동~광주~초월~곤지암~신둔 도예촌~이천~부발~세종대왕릉~여주까지 11개 역사가 들어섰다 하네요 그 중에서 세종대왕릉역이 눈에 띠는데 우리가 조선시대 왕중에서 가장 존경하는 성군이 있다면 단연 세종대왕을 꼽지요 훈민정음의 창제와 예약(禮樂)의 정리및 과학기술의 발전을 가져왔으며 국방을 튼튼히 하고 역사의 정체성을 확립하기도 하였지요 이런 존경스런분이 묻힌곳이 다름아닌 여주 영능이지요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능(合葬陵)인 영릉(英陵)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에 있으며 남한강이 뒤를 휘돌아 흐르고 북성산을 바라보는 명당인 영릉은 풍수지리학 적으로 조선의 최대 대명당으로 알려져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세종대왕이 승하하고 나서 곧바로 모셔진 릉이 현재의 영능인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요 세종대왕 능은 본래 서울 강남구 내곡동 대모산 아래에 있는 아버지 태종(이방원)이 묻힌 헌릉(獻陵) 서쪽에 있었다고 하는데 그곳은 풍수지리학 적으로 좋지않아 왕이 묻힐곳이 못된다고 하였지요 그러나 최고의 성군이자 효자인 세종대왕은 지관의 권유와 신하들의 진언을 뿌리치고 "부모님 묘 근처보다 더 좋은 명당이 어디 있겠느냐"고 고집하며 아버지가 묻힌 헌릉 서쪽에 승하하기 전부터 자리를 잡았지요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세종대왕을 그곳 헌능에 모시고 난뒤 왕실에 많은 문제가 발생 했어요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병으로 즉위 2년만에 승하하였고 문종의 아들 단종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나 삼촌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 당하고 비명횡사(非命橫死) 하였으며 세종의 둘째 아들 세조(수양대군)는 어린 조카를 죽이고 왕이 되었으나 얼굴과 몸에 부스럼이 나는 병에 걸려 살이 문드러지는 고통에 시달렸지요 그리고 세조(수양대군)의 큰아들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증 됨)는 20세에 요절하였어요 세종대왕이 여주 영릉으로 옮기기까지 19년 동안 왕이 네분이나 바뀌었으며 왕실에서는 흉사(凶事)가 끝일날이 없었지요 이렇게 흉사가 거듭되자 내곡동에 있는 헌능(獻陵)이 지하에 찬물이 든 냉혈(冷穴)이라 시신이 썩지 않고 생시(生屍)로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며 이장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았으나 세조때 서거정이 "천장(遷葬:왕능을 이장하는것)함은 복을 얻기 위한 것인데 지존인 왕이 다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라며 반대하여 옮기지 못하다가 예종이 즉위하자 신하들 사이에서 더이상 이대로 둘수 없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지요 그러자 마침내 예종은 신하들의 상소에 못이겨 천장을 결심하고 전국에서 뛰어난 지사(지관)를 선발하여 세종대왕을 모실 명당을 찾으라고 명하였지요 그러할 즈음 여주땅에서는 이런일이 있었어요 어느 사부대집 집안의 노친이 슬하에 5형제 자녀들을 모아놓고 "내가 죽거든 내가 잡아논 자리에 반드시 묘를 쓸것이며 후일 너희들과 너의 자손들이 아무리 잘되고 가문이 번창해도 묘앞 냇가에 다리를 놓지말고 제실(祭室)이나 사당(祠堂)을 짖지 말도록 하라"고 유언을 남기고 저 세상으로 떠났지요 자식들은 아버님의 유언에 따라 아버님이 잡아논 유택(지금의 영능자리)에 아버님을 모셨는데 그 뒤로 부터 아버님의 묘자리가 좋아선지 5형제가 모두 정승판서가 되었다 하네요 그렇게 5형제 모두가 고관대작이 되다보니 아버님 묘소에 갈때마다 신발을 벗고 물을 건너야 하는 불편과 성묘시 비라도 올라치면 비 피할곳이 없는지라 아버님의 유언이 있었으나 형제들이 의논하여 앞냇가에 다리를 놓았고 제실(祭室)도 큼지막하게 지었지요 그런일이 있고 나서 얼마의 시간이 흐른뒤 예종이 세종대왕을 이장할 능자리를 찾으라는 명이 내려진 것이지요 지사(地使)로 선발된 지관(地官)들이 세종대왕 능자리를 찾기위해 한양에서 백리안에 있는 땅을 모조리 찾아보았으나 마땅한 자리가 없었어요 임금의 능은 원칙적으로 도성에서 1백리를 넘지 않아야 하는데 이는 임금이 성묘하러 행차하였다가 하루만에 돌아올수 있는 거리여야 하기 때문이었지요 그런데 마침 여주 이천 쪽으로 새로운 능자리를 찾으러 나온 안효례 지관 일행은 며칠을 돌아 다니다가 현재 영릉 부근을 지나던중 갑자기 억수같은 소낙비를 만났어요 그곳은 집한채 없는 온통 논과 밭뿐인 인적이 드문 호젓한 산골길 이었지요 일행은 황급한 나머지 비를 피할 곳을 두리번 거리며 찾던중 마침 저멀리 다리 건너에 제실(祭室)이 눈에 들어왔어요 옳커니 우선 소낙비를 피할 요량으로 다리를 건너 뛰어가 제실에서 비를 피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소낙비가 그치고 나서 밖으로 나와 보니 제실(祭室)위에 있는 묘가 빗속에서도 서기가 비추는 것이었어요 눈을 부릅뜨고 가까이 가서 보니 보면 볼수록 천하의 대명당 자리 였지요 천선강탄형(天仙降誕形) 천하의 대명당이 바로 그곳이 아니던가 ... 지관들은 더 이상 머무르지 않고 한양으로 급거 귀경하여 임금에게 여주땅에서 천하대명당(天下大明堂) 자리를 찾았다고 아뢰었고 예종은 호조판서 노사신, 예조판서 임원준, 한성부윤 서거정 등을 여흥(여주)에 보내 천장(이장)할 자리를 답사 하였고 그뒤 정인지, 정창손, 신숙주, 한명회, 홍윤성 등과 좌의정, 육조참판 및 승지를 불러놓고 상지관(相地官)인 안효례(安孝禮)에게 물어 천하 대명당 자리를 어명으로 최종 결정하게 되었다 하네요 그런데 이 과장에서 문제가 된 것이 도성 100리 밖에 위치한다는 점과 현직 관찰사인 이극배의 선친인 이인손이 묻힌 자리라는 점이었지요 그러나 한양에서 이곳 여주까지 배로 하루에 오갈수 있다는 논리를 펴 넘어 갔으며 훗날 효종대왕도 동구릉(경기도 구리시 소재)에서 영릉으로 옮겨갈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선례 때문이었지요 그리고 아무리 지존무상의 대왕이지만 사대부의 묘택을 함부로 어찌할수는 없었던 것이었지요 그래서 당시 평안도 관찰사로 있던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李克培)를 조정으로 불러들였어요 그리고 인간적인 호소를 하였지요 말하자면 그 명당 터를 양도해달라는 은근한 압력을 우회적으로 구사했던 것이지요 원래 왕은 용상(龍床)에 앉아서 말하는 것이 상례였지만 단 아래 돗자리를 깔아 이극배를 앉게 하고 왕도 용상에서 내려와서 친히 그 옆으로 바싹 다가앉아 극배공(克培公)의 손목을 잡으며 "경은 얼마나 복이 많아서 선친의 산소를 그렇게 좋은 대명당에 모시었소? 짐은 삼천리 강산을 모두 갖고 있으되 조부 세종대왕을 편히 쉬게 할 곳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으니 나라에 극심한 한발과 폭풍우로 곤란을 겪는 일이 발생하고 있다오 그저 경들이 한량없이 부럽기만 하구려" 하면서 수차에 걸쳐 애원하다시피 이를 되풀이하니 바로 명당 터를 양보해달라는 뜻이었던 것이지요 하는수없이 극배공은 선친의 묘터를 양보 할수밖에 없었어요 예종은 할아버지 세종의 무덤을 여주로 옮기게 한뒤 이인손의 장남 이극배를 정1품으로 승진시켜 영의정에 봉하므로서 조상 묘지를 넘겨준 데 대한 보상을 하였지요 일단 왕릉이 들어서기로 결정되면 그 일대 십리 이내 모든 묘는 모두 이장해야 하므로 이때 수많은 묘들이 억지춘양식으로 이장되게 되었지요 그런데 영능자리에 먼저 있던 묘는 광주 이씨 집안 이인손의 묘 였는데 지관 안효례 일행이 비를 피하기 위하여 다리를 건너가 비를 피한 제실이 바로 이인손의 제실이었지요 만약 다리가 없었고 제실이 없었더라면 안효례 일행이 이인손의 묘를 알아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현재의 영릉자리에 있던 이인손의 묘도 옮겨지지 않았을 것이지요 만일 그 후손들이 부친의 유언만 잘 지켰어도 천하의 명당자리를 빼앗기지는 않았을지도 몰라요 이인손의 슬하에는 이른바 오극자손(五克子孫)이라고 불리는 극배(克培), 극감(克堪), 극증(克增), 극돈(克墩), 극균(克均)의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이인손의 큰아들 이극배가 영의정, 둘째 극감이 형조판서, 셋째 극증이 좌참찬, 넷째 극돈은 좌찬성 다섯째 극균은 좌의정이 되어 세칭 오군(五君)집안으로 당대에 널리 이름을 떨쳤지요 아무튼 영릉을 조성하기 위해서 땅을 파니 동방의 성인이 묻히는 곳이라는 뜻의 "당장동방성인(當葬東方聖人)"이라고 쓰여 있는 표석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것은 권력의 힘을 빌어 남의 묘를 강제로 이장시키고 차지한 것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지어낸 이야기로 추측된다 하지요 그런데 또 하나의 전설은 이장을 위해서 이인손의묘를 파자 유골 밑에 "이 자리에서 연을 날려 하늘 높이 떠오르거든 연줄을 끊고 연이 떨어진 자리에다 이장하라"라는 비기(秘記)가 나와 그대로 실행하자 연은 약 십리쯤 날아가다 떨어졌다고 하는데 이렇게 연이 날아가서 떨어진 자리에 묘를 쓴 이인손의 묘는 여주읍 연하산 부근에 있다고 하는군요 연이 날아가서 떨어진 마을은 여주읍 연라리(煙羅里)이며 이곳에 연이 떨어졌다 하여 일명 연하리(鳶下里)라 한다는 말이 전설로 내려오고 있어요 (내고장의 전통 풍속과 자연, 1984, 경기도) 이곳은 지금도 연라리(여주군 여주읍 연라리)라 불리고 있으며 연라리는 여주 신세계챌시 아울렛 부근이라 하네요 어찌됐든 세종대왕을 이 자리로 모신뒤 임금에 오른 의경세자 둘째 아들(자을산군) 성종은 25년간이나 재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성군이 되었으며 조선 왕조는 영릉의 발복으로 백년은 더 연장 되었다는 것이 풍수가들 사이에서 전해오는 이야기지요 반면에 영릉 자리를 빼앗긴 광주 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새로운 묘 자리가 발복하기 까지 수많은 화를 당했다고 하는군요 이인손의 막내아들 이극균은 좌의정에 오른 뒤 연산군의 폭정을 바로잡기 위해 애쓰다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나중에는 부관참시까지 당하였지요 이극균의 아들인 남양 부사 이세준과 이극감의 아들 이세좌는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지고 갔다는 죄명으로 처형당했으며, 이세좌의 아들 수원, 수형, 수의, 수정 등 4형제는 참수 당했고 이세좌의 동생 이세걸도 사약을 받고 죽었지요 이른바 갑자사화(甲子士禍)로 광주이씨 이인손의 후손들은 30여명이 화를 당했다 하네요 광주 이씨 집안은 쑥대밭이 되다시피 했지만 얼마 후 다시 번창하여 명종때 영의정을 지낸 이준경(李浚慶)을 비롯하여 선조 때 오성(鰲城)과 한음(漢陰)으로 유명한 이덕형(李德馨) 역시 광주이씨이며 영의정을 지냈으며 예조참판 이극기, 이조참판 이중경 병조판서 이윤우, 판서 이원정, 대사성 이정립 등이 후날 가문을 빛냈다 하는군요 돌이켜 생각해보면 지리의 이치란 참으로 묘한 것이지요 풍수지리란 하늘과 땅과 사람이 이토록 정확하게 조화하고 까마득한 미래의 운명까지도 좌우하는 것인지도 몰라요 명당터의 참주인은 누가 될 것이며, 이장은 언제 어느 곳으로 하게 되고 그날의 날씨는 어떠하다는 등등 천지인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있나봐요 이른바 '탈신공(奪神公) 개천명(改天命)'이니 지리(地理)에는 하늘의 명까지도 바꿀수 있는 무서운 힘이 있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그날에 소나기가 내리지 않았더라면 재실로 비를 피할 마음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요 다리를 만들지 않았더라면 건너지 못했을 것이며 그랬더라면 자손 천억 천선강탄형의 대명당도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니 지리의 이치란 그저 오묘하기만 하지요 그리고 세종대왕릉 좌우 경사면을 비롯한 후면의 소나무를 살펴보면 정사를 보는 대전에서 신하가 왕에게 공손히 예를 하는 모습과 같이 소나무가 좌우에서 능 쪽으로 기우러져 자라고 있으며 이는 성군에 대한 예를 갖추고 있는 듯 한 모습으로 볼수있다 하네요 아무튼 여주에는 두개의 영능이 있는데 조선4대 세종대왕능은 영능(英陵)이라하고 17대 효종대왕능은 녕능(寧陵)이라 하는데 세종의 영능은 (뛰어날 英자)를 쓰고 효종의 영능은 (편안할 寧자)를 쓰지요 그래서 이 두분의 왕능을 합하여 영녕능(英寧陵)이라 하는데 그냥 영능이라 부르고 있어요 그런데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하시고 과학과 농사등 많은 업적을 쌓아 민족의 성군으로 인식되었으나 효종은 아버지의 한을 풀고 원수를 갚기 위해 북벌계획을 추진하다가 41세의 나이로 요절해서인지 능역을 직접 가보아도 그 모습이 확연히 다름을 알수 있어요 두 능의 거리는 약 800m 정도이나 묘역의 규모나 정리 상태는 확연히 차이가 나지요 세종대왕능은 묘역자체가 크며 화려하고 많은 공을 드린반면 효능대왕능은 작지만 조촐하면서도 차분한 느낌을 받을수 있어요 입장료(500원)를 내면 두곳을 다 볼수 있지만 대부분의 참배객들은 세종대왕의 묘역에만 참배하고 효종대왕의 묘역은 찾지 않고 발길을 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그리고 여주에는 이곳 말고도 비운의 황비 "명성황후 생가"도 있으며 영능의 주찰인 "신륵사"를 비롯하여 "목아불교 박물관" "도자기전시장" 등 많은 볼거리가 있으니 언제 한번 시간내시어 새로 개통된 전철을 타고 여주에 들려 이곳 저곳 둘러 보시기 바래요 -* (일송) *-


    ▲ 세종대왕능 정문 입니다



    ▲ 세종대왕 박물관과 야외 전시장 입니다



    ▲ 야외 전시장



    ▲ 실제 왕능의 정문 이랄수 있는 훈민문이지요



    ▲ 훈민문을 들어서면 멀리 홍살문 정자각 뒤로 능이 보이지요



    ▲ 정자각으로 향하는 돌길 좌우는 참도(참례하러가는길)라 하며 가운데 높은 길은 신도라 하여 돌아가신 선왕의 혼령만 다닐수 있는 길이지요 항상 능으로 오르는 길은 양쪽으로 나있는데 동입서출이라 해서 동쪽으로 오르고 서쪽으로 내려온다 하네요



    ▲ 세종대왕과 소헌왕후의 합장능(合葬陵)



    ▲ 세종대왕능은 원래 헌능(서울 내곡동)에 있었는데, 예종때 이곳으로 옮기면서 소헌왕후와 합장을 하고 더욱 확장을 하였지요



    ▲ 정자각 오른쪽에는 수복방이 있어요 제기를 보관하거나 능을 지키는 관리가 거처하던 곳이지요



    ▲ 정자각은 제례때 제물을 드리는 집이지요 건물이 T자 모양을 하고 있어 한문의 정(丁)자와 닮아서 정자각이라 하지요



    ▲ 효종대왕능 영능(寧陵)



    ▲ 조선 제17대 효종대왕과 인선왕후 능이지요



    ▲ 효종대왕과 인선왕후의 쌍묘이지요


    서울시 내곡동 태종 헌능 옆에 자리하고 있던 세종대왕능이 예종 원년에 경기도 여주로 천장하게 됨에 따라 헌능에 있던 세종대왕능 석물들은 무게가 있어 옮기지 못하고 땅속에 묻어놓은것을 발굴하여 청량리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 전시해 놓았어요


    ▲ 기념비



    ▲ 수표석이지요



    ▲ 헌능에 있던 석물들







    ▲ 헌능에 있던 우물상석 이라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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