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죽음으로 단종을 지킨 성삼문

청정지역 2017. 4. 7. 21:30

              

[신병주의 '왕의 참모로 산다는 것'] 

죽음으로 단종을 지킨 성삼문 |

 "상왕(단종) 계신데 나리(세조)의 신하는 될 수 없다"

1456년 2월 세조를 제거하고 상왕 단종을 복위시키려는

거사가 사전에 누설됐고 주모자들은 줄줄이 압송됐다. 거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은 성삼문(成三問, 1418~1456년). 그와 뜻을 같이했던 핵심 인물 6명은 ‘사육신(死六臣)’으로 불리며 지금도 충신의 대명사로 인식된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지금의 홍성) 적동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이다. 단종 복위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도총관 성승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첨의 딸이다. 1435년(세종 1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438년에는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1447년에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했다. 세종이 집현전을 설치한 후 인재를 모을 때 집현전 학사로 뽑혔으며, 세종의 총애 속에 홍문관 수찬·직집현전(直集賢殿) 등의 직책을 지냈다. 1442년에는 오늘날 유급휴가 제도의 기원이 된 사가독서(賜暇讀書·관리들에게 휴가를 줘 독서에 전념하게 하던 제도)를 북한산의 진관사에서 했고, 세종 곁에서 주요한 정책 과제를 연구했다.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성삼문이 주도적으로 참여했음은 세종실록 기록에도 잘 나타나 있다.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1446년 반포되는 과정에서 명나라 요동을 13번이나 왕래하며 유배 중인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을 만나 훈민정음을 정교히 완성하는 데 기여했다. 병으로 고생하던 세종에게 성삼문은 늘 곁에 두고 싶은 신하였다.

세종 사후에도 성삼문은 문종과 단종을 보필하며 ‘세종실록’ ‘역대병요’의 편찬 등 주요 사업을 수행했다. 특히 어린 단종을 부탁한 문종의 유명(遺命)은 성삼문에게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하지만 성삼문의 인생은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난 계유정난으로 큰 전환을 맞이한다.

1453년(단종 1년)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대군(후의 세조)이 황보인·김종서 등을 죽이고 정권과 병권을 잡았다. 정변의 성공으로 수양대군은 영의정 이하 모든 권력을 차지했지만 여전히 왕은 단종이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나 황보인의 빈자리를 채울 수 있는 젊고 명망 있는 관리로 성삼문을 주목했다. 성삼문은 세종대부터 함께 중요한 국책 사업을 해온 동료기도 했다. 성삼문이 직접 계유정난에 가담하지 않았음에도 수양대군은 그에게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의 칭호를 내리며 포섭하려 했다. 성삼문은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결국 공신에 책봉됐다. 단종이 여전히 왕이었기에 성삼문의 관직 생활도 계속됐다. 1454년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고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는 예방승지가 된다. 예방승지는 성삼문에게 가혹한 운명을 예고하는 직책이었다. 1455년 윤 6월 수양대군의 압박 속에서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던 날 성삼문은 바로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상징하는 옥새를 전해주는 비서의 자리, 즉 예방승지의 직책에 있었다.

“세조가 선위를 받을 때에 자기는 덕이 없다고 사양하니, 좌우에 따르는 신하들은 모두 실색해 감히 한마디도 내지 못했다. 성삼문이 그때에 예방승지로서 옥새를 안고 목 놓아 통곡하니, 세조가 바야흐로 겸양하는 태도를 취하다가 머리를 들어 빤히 쳐다봤다.”

연려실기술에 담긴 내용이다. 향후 두 사람의 갈등을 예고한 장면이다.

성삼문은 직책상 수양대군에게 어쩔 수 없이 옥새를 전달했지만 그의 마음은 더 이상 세조의 신하가 아니었다. 성삼문은 집현전에서 동문수학했던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등 뜻이 맞는 동지들을 규합하기 시작했고 무인인 유응부도 거사에 합류했다.

성삼문 등 단종 복위운동을 주도한 이들에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1456년 6월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에 세조는 단상에서 왕을 호위하는 별운검을 세우기로 하고 성삼문의 아버지인 성승과 유응부를 적임자로 지목했다. 시해를 모의한 주동자들이 직접 세조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성삼문 등은 이날을 거사일로 잡고 세조와 세자(세조의 아들), 세조의 측근들을 제거하기 위해 보다 치밀하게 계획을 준비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이 꼬이기 시작했다. 한명회 등이 연회 장소인 창덕궁 광연전이 좁고 더위가 심하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세우지 말고 세자도 오게 하지 말 것을 청하자, 세조가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거사 주모자들 간에는 의견이 엇갈렸다. 유응부 등은 일이 누설될 가능성을 염려하면서 계획대로 일을 추진하자 했고, 성삼문과 박팽년은 ‘별운검을 세우지 않고 세자가 오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니 거사 날짜를 다시 계획하자’고 했다.

결국 거사는 연기됐고 유응부 등의 우려대로 내부의 밀고자가 나타났다. 거사가 연기되면서 불안해진 김질이 장인인 정창손을 찾아가 상왕 단종 복위운동의 전말을 알린 것이다. 정창손은 그길로 사위와 함께 궁궐로 달려가 세조에게 사실을 알렸다. 즉시 성삼문 등에 대한 체포령이 떨어졌고 단종 복위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이 줄줄이 압송됐다.

세조는 친히 국문을 하면서 이들을 협박하고 회유하려 했으나, 이들은 세조의 왕위 찬탈 부당성을 공격하면서 뜻을 굽히지 않았다. 성삼문은 “상왕이 계신데 나리가 어떻게 나를 신하로 삼을 수 있는가”라며 세조를 자극했다.

성삼문이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도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만 깔려 있었다고 전해진다.

성삼문의 동지인 박팽년은 세조를 일컬을 때마다 ‘나리’라고 했고, 세조 재위 시절 충청도관찰사로 있으면서 올린 문서에는 ‘신(臣)’이라는 용어를 쓴 적이 한 번도 없음이 조사에서 밝혀지기도 했다. 그만큼 세조를 왕으로 인정하지 못한다는 의지가 강했다. 사육신을 비롯한 거사 참여자들 대부분은 엄청난 고문을 당했다. 성삼문은 모진 고문 속에서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不忠)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불에 달군 쇠로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내게 했으나 그의 안색은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형장에서 성삼문은 사지를 찢기고 목이 잘려 전신이 토막 나는 참혹한 죽음을 맞이했다. 1456년 6월 7일이었다.

성승도 아들과 함께 참형을 당했다. 성삼문의 동생 삼빙(三聘)·삼고(三顧)·삼성(三省)과 아들 맹첨(孟瞻)·맹년(孟年)·맹종(孟終)과 갓난 아들, 손자 헌택(憲澤)까지 모두 죽음을 당했다. 성삼문 가문은 ‘멸문의 화’를 겪었으며, 성삼문의 처와 딸마저 노비로 팔려가는 비운을 당했다.

단종 복위운동 사건에 연루돼 죽음을 당하거나 화를 입은 인물은 사육신을 비롯해 권자신, 김문기 등 70여명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역적이었으나, 16세기 이후 이들이 보인 충절과 의리는 후세 귀감이 된다. 사육신의 충절을 따르려는 사람들은 중앙 관직을 버리고 대부분 지방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이면서 조선 전기 사림파의 뿌리를 형성한다. 우리가 흔히 ‘사육신’으로 알고 있는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6명이 사육신으로 지칭되기 시작한 것은 남효온이 ‘육신전’을 저술한 것에서 비롯된다. 남효온의 문집을 통해 수양대군의 불법에 맞서 저항한 이들의 명성은 재야의 사림(士林)을 중심으로 널리 전파됐다. 남효온은 김시습, 원호 등과 함께 몸은 비록 살아 있어도 정신은 사육신을 계승한다는 뜻에서 ‘생육신’으로 불렸다.

성삼문 등이 공식적으로 복권된 것은 단종 복위운동이 일어난 후 230여년이 지난 조선 후기 숙종 때였다. 숙종은 1691년(숙종 17년) 사육신의 관작을 회복하고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숙종은 사육신에 대해 ‘당세에는 난신이나 후세에는 충신’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사육신을 처형한 세조 입장도 적절히 고려하면서 성삼문 등 사육신을 복권한 것이다.

사육신 복권과 함께 1694년(숙종 24년) 11월 6일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묘호가 올려졌다. 단종이 공식적으로 왕의 위상을 회복한 순간, 성삼문은 238년간 응축했던 울분을 사후에서 조금이나마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신병주 건국대 사학과 교수]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1901호 (2017.03.29~04.04일자)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