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어리장갑 속의 다섯 손가락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우내 추위를 막아주었던
외투. 털모자. 장갑들을 장롱이나 서랍에 넣어 둔다.
난 그때마다 20여 년 전 아내가 짜준 벙어리장갑을 떠올리곤 한다.
참 따듯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다섯 손가락 중 엄지는 독방을 쓰고,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은 늘 같은 방을 쓰면서
딱 붙어 수다를 떨곤 했던 벙어리장갑.
아마도 엄지가 제일 추웠을 것이다.
그래도 엄지는 늘 안 추운 양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항상 자기가 '최고'임을 자부했고,
좋은 것을 말할 때는 항상 혼자 나서 대장임을 호령한다.
아마도 '짧고 굵게'라는 모토로 길어지려는 노력보다는
굵어지려는 노력으로 다른 긴 손가락들을 다 제치고
으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엄지는 도장을 대신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주먹을 쥘 때도 꼭 네 손가락이 엎드리고 나서야 그 위에 앉는다.
검지는 길을 몰라 답답해하는 사람에게 친절히
어딘가를 가리키는 좋은 일도 하고
겁 없이 누군가를 지적하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그 중 똑똑한 검지는 남를 지적하기 전에
안쪽으로만 구부릴 수 있는 생리를 파악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자연스럽게 구부러진다는 생리마저 잊은 채
늘 지적만 하는 건방진 검지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중지는 다섯 중에 키가 제일 크다.
딱히 쓰임새를 찾아보기 어렵고
괜히 장갑 길이만 길게 만드는 것 같지만
그래도 높은 선반에 물건을 얹을 때
결정적으로 최후에 밀어 넣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 번째 약지는 보기보다 참 적극적인 친구다.
키로 치자면 넘버 투임에도 안주하지 않고
약 젓는 일만큼은 자기일이라 선포하는 등
스스로 자기 일을 찾아다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는가?
그래서인지 비싸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반지를 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소지라고 불리는 새끼손가락.
꼭 지킬거라 불안한 약속들을 안심시키며
누구보다도 믿음과 확신을 주는 마지막 손가락.
그래도 불안하다 하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킨다는 확신을 피까지 흘려 가며 약정하는
아주 소신 있고 외모에 비해 심지가 굳은 친구다.
키가 제일 작은 것도 아닌데 맨 끝에 서서
답답한 콧구멍의 궂은 일도 마다않는
무척이나 겸손한 우리의 스타다.
네 손가락은 절대 키 순서대로 서겠다고 싸우지 않는다.
자기 역할이 중요하다고 순서를 바꾸려 하지도
앞에 나서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역할이 크든 작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정해진 순리대로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네 손가락이 비굴해서가 아니다.
대장을 예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오만하고 멍청한 엄지들은
아직도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네 손가락이 벙어리인 줄만 알고 있는 것 같다.
넓은 방엔 엄지도 함께 할 수 있지만
그 좋은 엄지 방에는 다섯 손가락이
다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언제든지 춥거나 외롭거든 고집부리지 말고 큰 방으로 건너와라.
금방 훈훈해진다.
손가락장갑보다 벙어리장갑이 훨씬 따뜻하다.
손가락들은 악수할 때 너나 할 거 없이 합세해야만
상대방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 좋은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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