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상 · 좋은글

벙어리장갑 속의 다섯 손가락

청정지역 2018. 1. 31. 18:57


벙어리장갑 속의 다섯 손가락

 

따뜻한 봄이 오면 겨우내 추위를 막아주었던

외투. 털모자. 장갑들을 장롱이나 서랍에 넣어 둔다.

난 그때마다 20여 년 전 아내가 짜준 벙어리장갑을 떠올리곤 한다.

참 따듯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다섯 손가락 중 엄지는 독방을 쓰고,

검지. 중지. 약지. 새끼손가락은 늘 같은 방을 쓰면서

딱 붙어 수다를 떨곤 했던 벙어리장갑.

아마도 엄지가 제일 추웠을 것이다.

그래도 엄지는 늘 안 추운 양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항상 자기가 '최고'임을 자부했고,

좋은 것을 말할 때는 항상 혼자 나서 대장임을 호령한다.

아마도 '짧고 굵게'라는 모토로 길어지려는 노력보다는

굵어지려는 노력으로 다른 긴 손가락들을 다 제치고

으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가 엄지는 도장을 대신하는 것 같은 중요한 일들을 처리하고

주먹을 쥘 때도 꼭 네 손가락이 엎드리고 나서야 그 위에 앉는다.

검지는 길을 몰라 답답해하는 사람에게 친절히

어딘가를 가리키는 좋은 일도 하고

겁 없이 누군가를 지적하다가 봉변을 당하기도 한다.

그 중 똑똑한 검지는 남를 지적하기 전에

안쪽으로만 구부릴 수 있는 생리를 파악하고

자신을 돌아보는 센스를 발휘하기도 한다.

물론 자연스럽게 구부러진다는 생리마저 잊은 채

늘 지적만 하는 건방진 검지들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중지는 다섯 중에 키가 제일 크다.

딱히 쓰임새를 찾아보기 어렵고

괜히 장갑 길이만 길게 만드는 것 같지만

그래도 높은 선반에 물건을 얹을 때

결정적으로 최후에 밀어 넣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네 번째 약지는 보기보다 참 적극적인 친구다.

키로 치자면 넘버 투임에도 안주하지 않고

약 젓는 일만큼은 자기일이라 선포하는 등

스스로 자기 일을 찾아다닌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했는가?

그래서인지 비싸고 중요한 의미를 지닌

반지를 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는지도 모른다.

소지라고 불리는 새끼손가락.

꼭 지킬거라 불안한 약속들을 안심시키며

누구보다도 믿음과 확신을 주는 마지막 손가락.

그래도 불안하다 하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해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킨다는 확신을 피까지 흘려 가며 약정하는

아주 소신 있고 외모에 비해 심지가 굳은 친구다.

키가 제일 작은 것도 아닌데 맨 끝에 서서

답답한 콧구멍의 궂은 일도 마다않는

무척이나 겸손한 우리의 스타다.

네 손가락은 절대 키 순서대로 서겠다고 싸우지 않는다.

자기 역할이 중요하다고 순서를 바꾸려 하지도

앞에 나서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역할이 크든 작든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정해진 순리대로 순응하며 살아간다.

이것은 네 손가락이 비굴해서가 아니다.

대장을 예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오만하고 멍청한 엄지들은

아직도 같은 방을 쓰고 있는 네 손가락이 벙어리인 줄만 알고 있는 것 같다.

넓은 방엔 엄지도 함께 할 수 있지만

그 좋은 엄지 방에는 다섯 손가락이

다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언제든지 춥거나 외롭거든 고집부리지 말고 큰 방으로 건너와라.

금방 훈훈해진다.

손가락장갑보다 벙어리장갑이 훨씬 따뜻하다.

손가락들은 악수할 때 너나 할 거 없이 합세해야만

상대방의 따뜻한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진리를 알고 있다.

 

 

 

 

                - 좋은 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