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그는 무엇 때문에 암행어사의 전설로 남았을까?

청정지역 2018. 2. 24. 20:51

  암행어사 대명사 박문수  


암행어사 대명사 박문수.
하지만 그가 암행어사로 활동한 기간은 1년도 채 되지 않는다.
그는 무엇 때문에 암행어사의 전설로 남았을까?
어사 박문수를 만나본다.


 1  암행어사의 대명사 박문수 - '문수신'? 



정월 대보름을 맞아 경상도 한 마을에서는 제사를 지낸다. 오래전부터 마을의 수호신으로 섬기고 있는 '문수신'. 사람들은 문수신에게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한다. 그런데 이들이 모시는 문수신이란, 암행어사 박문수(朴文秀, 1691-1756)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왜 박문수를 신으로 받들고 있는 것일까? 박문수는 우리에게 암행어사로 잘 알려져 있다. 암행어사는 특별한 직책으로 비밀리에 임금의 명을 받아 수행하는 관리를 말한다. 이들은 보통 수령들의 비리를 고발하고, 힘 없는 백성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역할을 도맡아 했다. 힘없고 가난한 조선 백성들의 마지막 희망이 바로 암행어사에게 있었다. 조선 시대는 명종 이후 350여 년간, 600여 명의 암행어사가 파견되었다.

이 많은 암행어사 중에 오늘날까지도 기억되고 존경받는 암행어사가 박문수다. 그런데 암행어사 박문수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박문수만이 암행어사의 대명사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2  짧았지만 빛나는 암행어사 행적 


경북 문경시 조령관. 경상도 문경새재의 세번째 관문인 조령관. 이곳에 어사 박문수에 대한 전설이 전한다. 암행어사 박문수가 문경을 지날 때 산봉우리에 마패를 걸어두었는 데 그 때문에 마패봉이란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 뒤에 보이는 봉우리가 마패봉이라고 해서 어사 박문수가 이곳에 와서 쉴 때 마패를 걸어두었다고 마패봉이라고 전하고 있는 곳입니다.  아마 영남 어사로 발령 받아 이곳을 지나다 쉬면서 자기의 업무에 대한 각오, 이런 것들을 다진 장소라 할 수 있습니다. "
/ 안태현 학예연구사 (문경새재 박물관)

< 한국학중앙연구원>(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박문수에 대한 이야기는 뜻밖의 기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설화, 만 오천여 편을 모아 놓은 <한국구비문학대계>. 인물 관련 설화 중 가장 많은 이야기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어사 박문수에 대한 이야기다.
* 억울한 누명을 벗겨준 박문수
* 열녀에게 뺨 맞은 어사 박문수
* 꼬마한테 멸시당한 박문수
* 살인자 찾아 낸 박문수
* 박문수와 여자 원혼
* 초립동의 원한을 갚아준 박문수
* 점장이 덕분에 죽음 면한 박문수
"어사 활동중에서 '어사 출두!~' 이야기를 담은 내용이 '무주 구천동에 출두한 어사 박문수'에 나옵니다. 이 이야기가 가장 흥미있는 이야기라 볼 수 있습니다."
/ 김병선 교수(한국학중앙연구원)

 3  설화속에 박문수. 그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 


"전라도 구천동 마을을 암행중이던 박문수는 밤이 깊어 하룻밤 묵을 곳을 찾고 있었다. 한참을 걷다 겨우 한 집을 발견했는데 방안에서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멈추시오!~" 노인이 젊은이를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문수가 자초지정을 캐묻자 노인은 마을 부자 천씨가 자기 며느리를 빼어가 혼인하려고 해 아들과 더불어 죽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죽더라도 하루만 좀 참아보시오." 다음날 박문수는 천씨의 혼례식장으로 출두했다. 그리고는 천씨를 끌어내 그 죄를 물었다."

경북 영양군 수비면 <문수당> '문수신' 이곳에는 박문수를 신으로 모시는 성황당이 남아있다. 박문수는 경상도 어사로 와서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해주고 곡식도 나누어 주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그 은혜를 기리기 위해 박문수를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고 한다. "박문수 그 어른이 오셔서 원집을 중심으로 곡식을 나눠주고 좋은 일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경상도 중심으로 신과 같이 모셨는 데 그 어른이 돌아가신 후에 원집을 성황당으로 지어가지고 현재까지 모시고 있는 거예요"
/ 이종명(영양군 수비면)

* 조선시대 야담집 <기문총화(記聞叢話)>, <청구야담(靑邱野談)>...암행어사 시절 박문수가 백성들에게 베푼 선정은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그리고 그것은 어사 박문수에 대한 무수한 전설과 이야기들을 만들어냈다.  "어사 박문수는 어느날 홀어머니와 아들, 단둘이 사는 집에 묵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그 사정을 물었다. 아들은 좌수댁에 혼인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좌수댁은 자기를 무시한 처사라며 노발대발했다는 것이고 심지어 좌수는 심지어 날마다 총각을 불러 모욕을 주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들의 딱한 사정을 들은 박문수는 곧장 좌수댁으로 찾아갔다. "가난한 집에 딸을 보낼 수 없소이다." 좌수가 들은 척 않자, 결국 박문수는 마패를 보여주며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리고 좌수에게서 혼인 약속을 받아냈다. 또 좌수의 재산 절반을 사위에게 주도록 했다."



실제 박문수는 나이가 차도록 결혼을 못한 처녀들의 혼인 문제까지 나서서 처리할 정도로 민생 문제에 귀를 기울인 어사였다. "지금 서울 밖의 처녀로 나이가 20, 30이 넘도록 시집 못간 자가 매우 많아 원망이 가슴에 맺혀 화기(火氣)로 손상할 것입니다."
/ 영조실록 1730 12. 24

1926년 경성서적 <박문수전(朴文秀傳)>. 암행어사 박문수의 활약담은 조선 시대 이후 꾸준히 전해져 1920년대 소설로도 등장했다. 오직 백성을 살피고 돌보는 데 전념했던 박문수는 소설을 통해 더욱 강하고 전지전능한 암행어사로 다시 태어났다. "박문수가 한두번 암행어사를 했고, 또 백성들의 삶을 도와주고 바로 잡아주려고 했던 그의 의지와 활약이 전해지면서,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 '박문수' 하면 '암행어사'로 그 이야기가 확장되고 재생산되면서 더욱 꾸며지고 널리 퍼졌다고 보여집니다."
/ 최운식 명예교수(교원대 국어교육과)

시대를 뛰어넘어 민중들의 희망으로 기억되는 어사 박문수. 그의 전설은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홀어머니에 의해 양육, 서른 셋 과거 합격, 신분을 숨기고 암행, 백성속으로... 조선 최고의 실학자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그리고 명재상이었던 체재공. 이들의 한가지 공통점은 모두 암행어사를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다. 이렇게 쟁쟁한 인물을 두고도 암행어사 하면 박문수다. 그렇다면 박문수는 어떤 암행어사였을까? 충헌사(忠憲祠, 충남 천안시 북면). 박문수를 모시고 있는 사당. 고령 박씨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박문수의 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박문수가 받은 각종 교지들. 조정의 주요 관직들을 두루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고령 박씨 소론 명문가 집안에서 자라난 박문수는 일찍부터 총명함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박문수의 삶은 순탄치 못하였다. "아버님이 여덟살때 돌아가시고, 큰아버님이 그 전 해에 돌아가시고, 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집안의 어른들이 다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 박용기(박문수 8대손)

어린 문수를 홀로 키운 것은 어머니셨다. 어머니는 온종일 길쌈을 하여 끼니를 마련하고 아들을 공부시켰다.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늘 자신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돌보고 살았고 이것이 어린 문수에게는 가장 큰 가르침이 되었다.
/ 칠장사 나한전 (경기도 안산시 죽산면)

조선 시대 과거 시험을 앞둔 젊은이들이 많이 찾았다는 칠장사. 여기서 기도를 하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전설 때문인데 박문수도 이곳을 들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올라가시던 길에 이곳 칠장사에 들러 나한전에 기도를 하시고 주무셨는데 나한님께서 답안지를 일러주셔가지고.."
/ 지강스님(칠장사 주지스님)

박문수 과거 급제 교지(1723년, 경종 3년). 박문수는 서른 세살 되던 해 마침내 과거에 합격한다. 그리고 4년후에 암행어사에 발탁된다. 암행어사는 왕이 직접 선발했을 정도로 왕의 신임이 두터운 사람만이 뽑힐 수 있었다. 박문수는 그런 존재였다. 어사 박문수(御史 朴文秀)' "왕과 가장 가까우면서 동시에 강명한 사람이라는 전제가 되고, 그 다음 두번째로는 시무에 숙달된 자를 뽑았습니다. 아무래도 뭘 감시하려면 일을 잘 알아야 하니까요. 그래서 아주 초보자나 이런 사람들은 보내지 않았고 일정한 일에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파견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 고석규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임금은 암행어사가 지방으로 내려가 수행해야 할 일을 구체적으로 지시했는데 그 내용을 적은 것이 봉서(封書)다. 암행어사는 봉서를 읽고 자신의 임무와 암행지 등을 알게 된다. "암행어사로 자신이 가게 될지, 어떤 지역으로 가게 될지 미리 알 수 있나요?" "그것은 알 수 없습니다. 이 봉서를 받고, 성문밖에 나가 펼쳐 봤을 때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해야 할 일, 즉, 환곡 문제라든지, 노비 문제라든지 임무를 알 수 있었습니다."
/ 양진석 학예연구관<규장각한국학연구소>

봉서에는 암행해야 할 지역이 적혀 있다. 그런데 봉서는 반드시 도성을 벗어나 읽도록 되어 있다. 어사들은 주로 동묘(서울 종로구 숭인동)까지 와서야 봉서를 열어봤는데 암행지를 확인한 후에는 집에도 들리지 못하고 곧장 떠나야 했다. 그렇다면 암행을 어떻게 했을까?< 서수일기(西繡日記)>. 18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로 4개월간 활약한 행적을 담은 박내겸(朴來謙)이 남긴 한 권의 일기. 일기는 어사들이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고충을 겪어야 했는지 잘 보여준다. 무엇보다 어사들은 그 신분을 숨기는 것이 가장 어려웠다고 한다. "의심을 품고 발자취를 더듬어 몰래 쫓아다니면서 떨어지지 않아 몹시 힘이 들었다." 사람들의 의심을 받고 미행을 당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암행어사라고 의심을 받았을 경우 고의적인 방해가 있을 수 있겠지요. 때로는 가짜 암행어사로 몰려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구요. 그러니까 암행어사는 암행이라는 신분을 유지하기 위해서 때로는 목숨을 버리는 위험까지 감수하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 고석규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

실제로 전라도에서는 암행어사 홍양한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관아로 출두 직전 점심밥을 먹고 죽은 것이다. 이 때문에 독살의 의심을 받았다. 이처럼 암행어사들이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다면 박문수는 어떠했을까? 이유원(李裕元 : 1814~88)의 문집인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는 박문수를 두고 '종적을 잘 감춘 사람'이라고 적고 있다. 가난한 선비로 변장을 하고 박문수는 마을 곳곳을 염탐하고 다녔다. 당시는 수령들의 불법적인 수탈과 악행들이 끊임없이 벌어나고 있었다.

박문수는 수령들의 비리를 낱낱이 고발하고 가차없이 처벌했다. "자인현감 남국한은 스스로 밝지 못하고 술을 좋아해 백성들은 원망하며, 대구 판관 윤숙은 사람과 관직이 걸맞지 않고 전혀 일을 모르며, (大丘判官尹潚 人品不稱 全不解事 - 대구판관윤숙 인품불칭 전불해사) 울산부사 이만유는 어리석고 미련해 일을 살피지 못하니 아전들이 그것을 빌미로 간사함을 부리고 있다. (蔚山府使李萬維 昏不成事 吏緣爲奸 - 울산부사이만유 혼불성사 리연위간) 이에 세사람 모두 파직(罷職)할 것이다."
/ <영조실록 1728년 3월 11일>

"평소에 박문수는 ' 탐관오리징계법'을 엄격하게 집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사로 내려가서, 더우기 흉년이 들었는데도 기민들의 구제 사업을 소홀히 하고 있었던 수령들을 정말로 가차없이 징벌을 했기 때문에 기민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고, 그때부터 이미 암행어사의 전설이 되었지요."
/ 이세영 교수(한신대 국사학과)

 4  분징지청(分徵之請), "굶주린 백성을 위해 조정 대신들이 곡식을 내놓아야 합니다" 


박문수가 암행어사로 내려가 있던 당시 마을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 홍수와 흉년이 번갈아 마을을 휩쓸고 있었다. "수재(水災)와 한재(旱災)가 삼남(三南)에서 가장 혹독" 박문수는 백성들의 고통을 더 이상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곡식들을 털어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내어놓았다. 백성을 위한 선정이 무엇인가를 박문수는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암행어사로서 박문수가 보여준 행동은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뿐만 아니라 '분징지청(分徵之請)' 즉, 조정의 대신들도 자신이 가진 곡식을 내놓기를 청했다.

당연히 조정의 대신들은 이런 박문수의 행동을 쉽게 용납할 리 없었다. 급기야 박문수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정에 반대 상소가 빗발쳤다.
노론 대신들은 박문수의 주장이 조정 대신들을 기만하는 것이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어찌 조정에서 억지로 곡식을 바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당시 소론이었던 박문수는 정치적으로도 적대적인 존재였다.

박문수에 대한 공격은 계속 됐다. "국체에 손상이 많다(傷國體多)" "그 명령을 중지해야 한다(宜還寢其命)" 백성들의 고통은 더해 갔지만, 누구 하나 곡식을 내놓지 않았다. "진휼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무래도 지방의 지주들이죠. 그래서 지주들에게 진휼을 좀 할 수 있도록 반강제적으로 하게 됩니다. 그런데 좀처럼 지주들이 곡식을 내놓지 않지요."
/ 이세영 교수(한신대 국사학과)

< 구황촬요(救荒撮要)>. 굶주리는 백성들이 늘어나자 조정에서는 굶주림에 대처하는 방법까지 내놓았다. '굶어죽는 사람을 구하는 법' ▶'굶은 사람이 갑자기 밥을 먹으면 죽을 수 있으니 ▶ 간장을 찬물에 풀어 먹인 후 식은 죽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굶주리는 백성들을 살릴 수는 없었다.

영조 8년 12월 10일. 박문수는 삼남 지방에서 목격한 굶주린 백성들의 실태를 임금에게 낱낱이 고했다. 영조가 보고 받은 내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끔찍했다. '굶주린 백성이 사람의 시체를 구워 먹었다' 영조는 당장 대신들을 불러 모았다. 이 자리에서 박문수는 대신들의 녹봉을 감해 백성들을 구하자고 주장한다. "대신부터 녹봉을 감한다면 팔도의 인심이 모두 감격할 것입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녹봉은 여전하고 한결같이 태평하게 생각하니 백성의 원망함이 어찌 없겠습니다."
/ <박문수 연보>

대신들이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한다는 박문수의 비난. 대신들은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심지어 박문수를 정신 나간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광란(狂亂)한 잠꼬대' '놀랍고 도리에 어긋난 말'

 5  영조 4년, ' 이인좌의 난' 진압으로 '분무공신' 책봉 


그러나 대신들의 계속 되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박문수의 청에 따라 '문무백관의 녹봉을 감하게 했다.' 반발이 더 거세질 것은 분명한 상황. 영조는 왜 박문수를 믿었던 것일까?

영조 4년(1728년), 이인좌의 난.
이인좌를 중심으로 소론들이 반란을 일으킨다. 반란군은 청주성을 함락시키고 경상도 주요 지역을 장악했다. '적이 청주성 함락' '안음, 거창, 합천, 함양 점령' 영조는 병조판서 오명항에게 반란군 진압을 명령한다. 그런데 오명항과 함께 난을 진압하는데 앞장 섰던 이가 바로 박문수였다. 박문수는 오명항의 종사관으로 출전했다.
* 오명항선생토적송공비(경기도 안산시 낙원동)
* 무신역옥추안(戊申逆獄推案)
반란은 불과 보름여 만에 진압됐다. 반란에 가담했던 수백여 명이 처형되거나 귀향에 처해졌다. 반란이 진압된 직후 영조는 박문수에게 민심을 수습하는 일을 맡겼다.

박문수는 백성들이 동요할 것을 염려해 홀로 반란지로 들어갔다. 자신의 목숨보다는 나라를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나라를 위해 한 번 죽는 것을 겁내겠는가?" 박문수는 달아난 백성들을 불러모았다. 그리고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안심시키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게 했다. "너희들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죄를 묻지 않을테니 다시 돌아와 농사를 짓도록 하라." "조정에 박문수 이름을 알리게 된 것이 아마 그 일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또 영조의 경우에도 박문수가 자신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진심을 다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인정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박문수는 분무공신(奮武公臣)에 책봉 되었다. 그리고 그해 경상도 관찰사로 임명됐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 경상도 관찰사 임명 교지(敎旨)

 6  관찰사 박문수의 선택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요,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다' 영일만. 관찰사 시절 박문수는 영일만에서 관이 떠내려오는 것을 목격한다. 바다를 덮을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 가재도구와 관이 바다를 덮을 정도로 떠내려와 연일과 모포 변에 쌓였다."
/ <박문수 연보>

박문수는 함경도 지역에 물난리가 나서 가재도구가 떠내려오고 있다고 직감했다. "분명 관북 지방에 물난리가 났을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관곡 3천석을 모두 배에 실어 보내도록 하여라." "박문수 옆에 있던 관료들이 '조정의 명령도 없이 곡식을 보냈다가는 나중에 문책을 당하지 않겠습니까' 했는데 박문수는 '내가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요,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것은 큰 문제다' 이래서 미리 함경도에 쌀을 배에 실어 보냈습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쌀을 실은 배가 도착하자 백성들은 크게 놀랐다. "북쪽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北人大驚-북인대경)" 박문수가 곡식을 보내준 덕분에 함경도 백성들은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박문수에 감사하는 비를 새기고 그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새겨넣었다. * 영남관찰사 박문수 북민감은비(北民感恩碑) 탁본 조정의 눈치만 보는 관리들 틈에서 박문수는 소신있는 선택과 처신으로 백성들을 구해냈다. 박문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할 말은 하고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야 마는 매우 강직한 성품의 인물이었다. 이런 강직한 성품으로 박문수는 백성들 편에 서고, 백성들을 구하는 입장에 섰다. 암행어사직을 마친 박문수는 이제 조정에 돌아와서 백성들을 위한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7  양역(良役)의 혁파를 주장하는 박문수 


"신이 양역(良役)의 혁파를 제안한 것은 전부를 줄이자고 한 것이지 한필만 감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크게 변통하고자 한 것이지 조금만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
/ <영조실록 1750년 7월 3일>

조선 시대 백성들의 가장 큰 고통은 나날이 늘어나는 세금 징수였다. 전남 신안군. 세금 징수는 이제 육지를 벗어나 섬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신안 지역의 섬지역은 왕실에서 세금을 거둬가 백성들은 이중 삼중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세금을 부과를 했을 때 한군데서만 거둬가면 농민들의 의무를 다한 것으로 처리되어야 하는데, 중앙 왕실에서 거둬가고, 지방 행정과 관련된 곳에서 또 거둬가고, 토지는 한정되어 있는데 여러곳 거둬감으로써 시간이 흐를수록 농민들의 부담이 배가 되었다 그렇게 볼 수 있습니다."
/ 최성환 국장(신안문화원)

16세~60세 양인 남자, 군역 대신 군포 납부. 16개월에 두 필은 큰 부담이었다. 토지세와 더불어 백성들의 고통을 가중 시킨 것은 군역(軍役)이었다. 조선 시대 16세에서 60세 사이의 양인(양반, 중인, 상민) 남자들은 군역의 의무를 졌다. 즉 군포(軍布)를 내야 했다. 군포는 16개월에 두필을 냈는데 양반들은 내지 않고 일반 백성들에게만 부과되었다. 군포를 내지 못해 도망가는 백성들이 늘어만 갔다. "두 필을 내는 것은 굉장한 부담이었습니다. 물론 그것을 두 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 누구였겠습니까. 농촌의 부녀자들이 짜야 했는데 농사는 언제 지을 것이며, 군포의 값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 이세영 교수(한신대 국사학과)

군포의 폐단은 갈수록 더해갔는데 당사자를 대신해 친척이나 이웃에게 거둬가거나(族徵, 隣徵-족징, 인징) 군역의 의무가 없는 어린아이에게나(黃口簽丁-황구첨정) 죽은 사람에게도(白骨徵布-백골징포) 징수하였다. 백성들은 부과된 군포를 내지 못하면 다른 재산으로라도 그만큼의 몫을 빼앗겼다. 이 때문에 남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하며 스스로 성기를 자르는 일(自割其陽-자할기양)도 일어났다.

그러나 백성이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수령이 처벌받는 경우는 드물었다. 조선 초기부터 존재했던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때문이었다. 법에 따르면 수령을 고소한 백성은 곤장 백대와 징역 3년에 처해졌다. "관찰사. 수령을 고발하는 자는 모두 받아드리지 아니하고 장(杖, 곤장) 백대, 도(徒,징역) 3년에 처한다"
/ <경국대전(經國大典)"

"수령은 어떤 일을 행하든 백성들에게 고소를 당하지 않게 됩니다. 따라서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시간이 지나면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백성들은 억울한 일이 있어도 호소할 수가 없고 자연 수령들의 비리, 탐학 이런 행동이 자행될 수 있겠습니다."
/ 고석규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

박문수는 세금에 짓눌리고, 폭정에 시달리는 조선 백성들의 고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백성을 살리기 위해서는 군역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문수의 주장에 따라 조정에서도 몇 년간 논의가 계속 되었다. 마침내 영조는 군포를 두필에서 한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단행한다. "양포를 반으로 감한다(良布減半-양포감반)" "신이 양역(良役)의 혁파를 제안한 것은 전부를 줄이자고 한 것이지, 한 필만 감하고자 한 것이 아니며, 크게 변통하고자 한 것이지 조금만 바꾸고자 한 것이 아닙니다 전하."
/ <영조실록 1750년 7월 3일>

당장은 부담이 줄었다고 하더라도 결국 부족한 군포는 백성들이 채워야 했다. 이러한 폐단을 막기 위해 박문수는 '양반도 세금을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문수는 양반, 상놈 할 것없이 역에 대한 부담을 지자, 그 방법은 각 호(戶, 가구)마다 돈을 내자, 호전법을 시행하고, 그래도 부족하면 어염세로 충당을 하자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노론 입장에서는 양반과 상놈을 가르는 게 군역을 지느냐 지지 않느냐인데 군역을 없애자는 것은 양반과 상놈의 구별을 없애자는 것이고, 그것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없애자는 거 아니냐며 영조에게 대놓고 반발합니다."
/ 이욱 박사(한국학진흥원)

 8  '소금장사꾼' 박문수, 민생 안정을 위해 소금을 만들다 


박문수는 군포를 대신해 세수(稅收)를 보충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제시했다. 그중에 하나가 어장과 염전에 부과되는 어염세였다. 당시 어민들이 왕실이나 권세가에게 바치던 어염세를 국가 수입으로 돌리자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 미역이 많이 나기로 유명했다는 미역바위(울산시 북구 강동구). 박문수는 당시 개인 소유였던 미역바위를 모두 국가로 환수해 세수를 늘였다. "세출이 전부 개인 가문에 돌아가기 때문에 국가적인 재정에 상당히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서 박문수 어사가 이곳을 방문해가지고 열두 개의 미역바위를 전부 국가로 환수했습니다."
/ 이수봉 명예교수(충북대 국어교육과)

양반과 일반 백성이 똑같이 세금을 내고 개인의 수입을 국가로 돌리자는 주장.당시 노론 대신들은 이를 용납할 수 없었다. 박문수에 대한 인신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마음대로 망령되게 행동(徑情妄行-경정망행)"
"기질과 성정이 불과 같다(氣性如火-기성여화)"

노론에게 박문수는 제거해야 할 적이었다. "박문수가 국가를 위해 진심으로 노력한다, 몸과 마음을 바쳐서 전력한다 그런 것은 다 인정합니다. 그런 만큼 소론의 대표적인 인물이 박문수였거든요. 결국은 뱀을 잡으려면 뱀의 머리를 잘라야 하는 것처럼, 박문수는 소론의 머리에 해당하는 인물이었습니다. 박문수를 제거하지 않으면 소론을 제거할 수 없고, 소론을 제거하지 않으면 노론 세상을 만들어 나갈 수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박문수는 결국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힌다.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명목으로 받은 돈 수만 냥을 '횡령'했다는 죄목이었다. "수만 냥을 싸서 서울로 보냈다." 노론들의 철저한 모략이었다.박문수는 이 거대한 벽 앞에서 홀로 싸우고 있었다. 궁지에 몰린 박문수를 구해준 것은 결국 임금 영조였다. 영조는 박문수가 옥에 갇힌 지 한달여 만에 풀어주고 상소를 올린 홍계희를 파직시켰다.

이처럼 영조는 박문수가 위기에 몰린 때마다 박문수의 편에 섰다. 노론 집권 대신들에게 박문수는 그야말로 눈에 가시같은 존재였다. 정치적으로도 소론 소수파의 한계를 안고 있었던 박문수는 늘 노론들의 끊임없는 모함과 공격에 시달려야만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결코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백성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박문수가 제안한 또 한가지는 소금이었다. 박문수는 소금을 생산해서 백성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소금을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요즘은 소금을 햇빛과 바다물에 증발시켜 쉽게 소금을 채취하지만 조선 시대엔 가마솥에서 열 시간 가까이 끓여서 소금을 얻을 수 있었다. 소나무도 베지 못하게 해 땔감을 구하기도 힘들었다(禁松-금송).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박문수는 직접 소금을 구웠다. 노론들은 박문수를 두고 '소금장사꾼'이라고 비난을 했지만, 박문수는 개의치 않았다. "박문수를 비롯하여 네 명이 그 일을 했는데, 그중에 두 명이 죽습니다.그렇게 그 일이 힘듭니다. 일은 힘든 데 돌아오는 것은 욕이고, 모두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박문수는 잘합니다. 그냥 잘하는 게 아니고, 그렇게 해서 6개월만에 3만 6천석의 소금을 생산하는데 그게 쌀로 환산하면 7만석이지요. 굉장한 효과입니다."
/ 이욱 박사(한국학진흥원)

박문수는 궁핍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영조를 질책하는 말도 서슴치 않았다. "백성은 궁핍하고 재물은 고갈되어 하나도 믿을만한 곳이 없으니 3백년 종사가 어찌 전하 때에 망하려는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국사를 물리치고 마음을 붙이려 하지 않으시니 장차 국가를 어떤 지경에 두려고 그러십니까!" 신하들은 박문수의 거친 말과 행동을 비난했지만, 영조는 박문수의 진심을 알았다. 박문수는 영조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신하였다. 그만큼 박문수는 국사에 중요한 일을 도맡아 했다.

< 조선시대 길쌈하는 아낙> <국가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제정한 탁지정례 > <度支定例(탁지정례)>를 편찬한 것도 박문수였다.
조정의 예산을 절약하기 위한 방책을 정리한 것인데 국가 재정의 용도와 규제 사항을 명확히 제시하고 있다.

< 탁지정례>가 완성된 후 영조는 또 한번 박문수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재정의 낭비를 막은 박문수의 공로를 크게 칭찬하며 손수 글을 써서 내렸다. "쓸데없는 비용을 크게 삭감했다"




 9  영조의 두터운 신임은 무너지고... 박문수 역적의 누명을 쓰다!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 <영조실록 1756. 4.26>

영조 31년(1755) 나주괘서사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이 나주 관아에 붙었다. 역모였다. 이를 주관한 것은 소론이었다. 그러나 역모의 실패로 소론들은 대거 숙청당한다. 이때 박문수도 역적으로 거론되었다. "박문수의 이름이 국문 초사에서 나왔다." 노론들은 이 기회에 박문수를 제거하고자 했다. "영조 31년, 을해옥사 당시에 박문수에 거기에 걸려듭니다. 박문수는 30여 년 영조를 섬겼고, 또 영조가 아꼈던 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되어 영조 앞에서 심문을 당하는 이런 모욕을 당하게 됩니다."
/ 정만조(국민대 국사학과)

영조마저 처음에는 박문수를 믿지 않았다. 박문수는 스스로 죄인임을 자초하여 세상과의 문을 닫아 걸었다. 그리고 역모 사건이 있은 지 일년후 박문수는 생을 마감한다.

영조는 박문수의 죽음을 누구보다도 안타까워 했다. 영조와 박문수는 임금과 신하를 떠나 서로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사이였다. " 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박문수이며 박문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은 나였다."
/ <영조실록 1756. 4.26>

훗날 <영조실록>을 편찬한 노론조차도 박문수의 자질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國事盡心-국사진심)" 살아 생전 승진에 관심이 없었던 박문수는 세상을 떠난 그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영의정 추증 교지' "아무리 조선 사회가 양반 사회라 하더라도, '양반들도 어느 정도는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 입장에 섰습니다. 그러니 일반 양반들에게 썩 달가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 이욱 박사(한국학진흥원)

"평생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국가를 바르게 경영한다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민생 문제를 자기가 꼭 해결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 정만조 교수(국민대 국사학과)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렸던 암행어사. 박문수는 바로 백성들의 이상을 실현 시켜준 암행어사였다. 원칙과 소신, 강한 개혁의 의지로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박문수.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온갖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던 조선 후기. 사회적으로 부조리를 해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졌던 암행어사는 분명 백성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희망의 대명사가 바로 박문수였다.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그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박문수. 그는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리던 관리의 모습을 몸소 실현했다. 박문수. 우리가 그를 전설의 암행어사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훗날 <영조실록>을 편찬한 노론조차도 박문수의 자질만큼은 높이 평가했다. "나랏일에 마음을 다했다(國事盡心-국사진심)" 살아 생전 승진에 관심이 없었던 박문수는 세상을 떠난 그날로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렸던 암행어사. 박문수는 바로 백성들의 이상을 실현 시켜준 암행어사였다.

원칙과 소신, 강한 개혁의 의지로 백성들을 구하고자 했던 박문수. 그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되고 있다. 정치, 경제적으로 온갖 문제들이 불거져 나왔던 조선 후기. 사회적으로 부조리를 해결하고 백성들의 고통을 어루만졌던 암행어사는 분명 백성들에게 구세주와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그 희망의 대명사가 바로 박문수였다. 오직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펼치고 그 뜻을 실현하고자 노력했던 박문수. 그는 백성들이 원하고 기다리던 관리의 모습을 몸소 실현했다.

      박문수.
      우리가 그를, 전설의 암행어사로 기억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