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목(碑木) - 그 숨은 이야기
40년 전 막사 주변의 빈터에 호박이나 야채를 심을 양으로 조금만 삽질을 하면 여기 저기서 뼈가 나오고 해골이 나왔으며 땔감을 위해서 톱질을 하면 간간히 톱날이 망가지며 파편이 나왔다. 탄띠 조각이며 녹슬은 철모 등이 나딩굴고 있었다. 실로 몇개 사단의 하고 많은 젊음이 죽어갔다는 기막힌 전투의 현장을 똑똑히 목도한 셈이었다. 카빈총 한 자루를 주워왔다. 그러고는 깨끗이 손질하여 옆에 두곤 곧잘 그 주인공에 대해서 가없는 공상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렇다면 영락없이 나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다. 일체가 뜬 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었는데 여기 一無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산록의 빠알간 단풍 의 물결에 부서지고 찌르르르 산간의 정적이 고막에 환청을 일으키던 어느 한적한 해질녘, 나는 어느 잡 초 우거진 산모퉁이를 돌아 양지바른 산모퉁이를 지나며 문득 흙에 깔린 돌무더기 하나를 만날 수 있었다. 팻말인 듯 나딩구는 썩은 나무등걸 등으로 보아 그것은 결코 예사로운 돌들이 아니었다.
틀림없다. 어쩌면 그 카빈총의 주인공, 자랑스런 육군 소위의 계급장이 번쩍이던 그 꿈많던 젊은 장교의 마지막 증언장이었음에 틀림없다. 비목 같은 간단한 노래가사 하나쯤은 절로 엮어질 수밖에 없었다는 감성적 개연성을 십분 수긍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나가 그같은 가사 하나쯤은 절로 빚어내고 절로 읊어냈음에 틀림없었을 것이 그때 그곳의 숨김없는 정황이었다.
속절없이 도회적인 세속 에 부평초처럼 표류하게 했지만 나의 뇌리, 나의 정서의 텃밭에는 늘 그곳의 정감, 그곳의 환영이 걷힐 날 이 없었다. 관심을 쏟던 의분의 시절, 그 때 나는 방송일로 자주 만나는 작곡가 장일남으로부터 신작가곡을 위한 가사 몇편을 의뢰받았다. 바로 그때 제일 먼저 내 머리속에 스치고간 영상이 다름아닌 그 첩첩산골의 이끼 덮인 돌무덤과 그옆을 지켜섰던 새하얀 산목련이었다. 포연에 산화한 무명용사로, 그리고 비바람 긴세월 동안 한결같이 그 무덤가를 지켜주고 있는 그 새하얀 산목련을 주인공따라 순절 한 연인으로 상정하고 사실적인 어휘들을 문맥대로 엮어갔다. 당시의 단편적인 정감들을 내 본연의 감수성으로 꿰어보는 작업이기에 아주 수월하게 엮어갔다. 비바람 긴세월로 이름모를 이름모를 비목이여 먼 고향 초동친구 두고온 하늘가 그리워 마디마디 이끼되어 맺혔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 홀로선 적막감에 울어지친 울어지친 비목이여 그 옛날 천진스런 추억은 애달퍼 서러움 알알이 돌이되어 쌓였네
그 소복한 연인 산목련 의 사연은 잊혀진 채 용사의 무덤을 그려본 비목만은 그 야말로 공전의 히트를 한 셈이며 지금도 꾸준히 불려지고 있다.
화약연기를 뜻하는 초연(硝煙)인 데, "초연하다" 즉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오불관언의 뜻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패목(牌木)의 잘못일 것이라는 어느 국어학자의 토막글도 있었고, 비목을 노래하던 원로급 소프라노가 "궁노루산"이 어디 있느냐고 묻기도 한 일이 있었다. 한번은 대원들과 함께 순찰길에서 궁노루 즉, 사향노루를 한마리 잡아왔다. 정말 향기가 대단하여 새끼 염소만한 궁노루 한마리를 잡았는데 온통 내무반 전체가 향기로 진동을 했다. 울어대는 것이었다. 덩치나 좀 큰 짐승이 울면 또 모르되 이것은 꼭 발바리 애완용 같은 가녀로운 체구에 목멘 듯 캥캥거리며 그토록 애타게 울어대니 정말 며칠 밤을 그 잔인했던 살상의 회한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놈도 울고 나도 울고 온 산천이 오열했다. "궁노루 산울림 달빛타고 흐르는 밤"이란 가사의 뒤안길에는 이같은 단장의 비감이 서려 있는 것이다.
모르는 영악한 이웃, 숱한 젊음의 희생위에 호사를 누리면서 순전히 자기탓으로 돌려대는 한심스런 이웃 양반, 이들의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인텔리겐차, 말로만 정의, 양심, 법을 되뇌이는 가증스런 말팔이꾼들, 더더욱 그같은 입장에서는 비목을 부르지 말아다오.
백목련의 통한을 외면 하는 사람, 한많은 백골들이 긴밤을 오열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들, 호국의 영령앞에 민주요, 정의요, 평화의 깃발 한번 바쳐보지 못한 저주받을 못난 이웃들이여, |
글 / 작사가 한명희(韓明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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