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제사는 왜 장남만 지내야 하는가?

청정지역 2019. 1. 28. 19:29





?제사는 왜

장남만 지내야 하는가?

 .

민족의 대명절 구정 설 과

추석이 다가온다.

구정 설 과 추석은 이제 온 가족이 모여

조상의 넋을 기리는 민족의 축제대신

제사의 책무를 진 대한민국 장남과

맏며느리의 막노동절이 되었다.

  .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딸이든

아들이든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

輪回奉祀가 일반적이었다던데,

장남만 제사를 모셔야 하는 지금의

이 의무장전은 언제,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

효는 사후에도 지속되어야 한다

거룩한 뜻이 담긴 제사에 얽힌

몇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여다보았다.

    


? 제사는 형제들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안 될까 명절에

꼭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제사다.

제사는 조상과 후손의 만남의 자리요,

부모 형제가 서로 정을 나누는 자리다.

 .

하지만 요즈음은 어떠한가.

자식은 다 같은 자식인데 제사는

왜 장남만 모셔야 하느냐

명절이 되면 여자들은 뼈 빠지게

일만 한다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

제사의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크게 들린다.

우리 집 이야기를 할까 한다.

우리 집은 1년에 명절 차례 두 번,

기제사 여섯 번, 모두 여덟 번

제사를 지낸다.

  

 

제사는 한번에 3대를 지내는데,

대를 달리할 때마다 간장이나 나물 등

기본적인 것만 그대로 두고 과일 등

나머지는 모두 새로 올린다.

명절 때는 무려 세 번 상을 다시

차리니 제사 시간은 물론

비용도 만만치 않다.

 .

이런 불편 때문에 생전에 모친께선

내가 죽으면 이것저것 차리지 말고

깨끗한 물 한 그릇만 떠놓아라하며

유언처럼 말하곤 하셨다.

  .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내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일일이 제물을 갈지 말고

한 번에 메와 술잔만 대 수대로

여섯 그릇만 놓고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하니 형수님들이

모두 좋다고 해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제사 방식을 바꾸었다.

    


나는 이를 모둠제사라고 부른다.

제물도 큰집 한 곳에서만

다 준비하지 않고

서로 잘하는 음식을 하도록 해,

?둘째는 고기와 적,

?셋째는 나물과 떡,

?다섯째는 전,

?막내는 과일,

이렇게 형제끼리 각기

몫을 나누어 준비토록 했다.

 .

제삿날이 돌아오면 모두 정성껏

제물을 준비해 와 순식간에

한 상이 차려졌다.

 .

이렇게 몇 년이 지난

어느 해 설 차례 때이다.

집안에서 막내인 내가

다 같은 자식인데 굳이

장남 집에서만

제사를 지내란 법이 어디 있느냐,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면

어떻겠느냐고 제안을 했다.

  

  

갑작스러운 이 말에 집 안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한참 동안 침묵이 흐르자

큰형님께서 조심스럽게 그러면

기제사는 내가 맡고, 설과 추석

차례만 너희들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어느 누구도 말이 없자

막내인 내가 안을 냈으니 거꾸로

나부터 다음 추석 차례를

우리 집에서 모시겠다고 했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 있던 집사람이

내 옆구리를 꾹꾹 찌르면서

어떻게 그런 결정을 자기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하느냐며

불평을 해댔다.

  .

의논 끝에 기제사는 맏형 집에서,

명절 차례는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기로 합의했다.

  .

한번은 장모께서 어떻게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느냐

물으시기도 했다.

자식들이 제사를 돌아가면서

지내는 것이 과연 우리 풍속에

어긋나는 것일까?

한마디로 그렇지 않다.

   

 

고려시대와 조선 중기인

17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오늘날처럼

큰아들이 제사를 전담하지 않고

큰아들, 작은아들 또는 딸들이

한 조상씩 맡아 지냈다.

 .

이를 윤회봉사라 했으며,

심지어는 외손봉사도 널리

시행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윤회봉사와

외손봉사는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에 접어들면서 성리학이

사회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치자

오늘날처럼 장자가 제사를

주관하게 되었다.

 .

이는 부계 중심의

종법 질서가 확고해지고,

재산도 아들딸 구별 없이 똑같이 나누는

균등 상속에서 차등 상속으로 바뀌면서

제사도 윤회봉사에서 장남 단독봉사로

변화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의 상속법도 아들딸

구별하는 차등 상속에서 균등 상속으로

바뀌었으니, 제사에 대한 부담도

장남한테만 지우지 말고

차례만이라도 형제끼리

돌아가면서 지내는 건 어떨까.

이것이 합리적이다.

지금도 제주도에서는 형제끼리 제사를

각자 나누어 지내는 윤회봉사를 한다.

제사는 반드시 사당이나 집에서만

지내야 한다는 법도 없다.

  .

조선시대에도 관리가 지방으로

발령이 나 제사 때 집에 오지 못하는

경우 사당을 대신하는 의미로 사당도를

걸어놓고 현지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실제로 형제들 간에 돌아가면서

차례를 지내다 보니, 부모님과

조상에 대한 생각과 제물에 대한

정성이 각별해질 뿐만 아니라,

장남인 큰형님의 고충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

비록 차례 때이긴 하지만

형님들은 동생 집에 갈 수 있어 좋고,

조카들도 큰집, 작은집을 오가게 되어

가족 간의 유대도 한결

두터워짐을 느꼈다.

제사는 몇 대까지 지내야 하는가

박물관에 근무하는 내게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이 제사는

몇 대까지 지내는 것이

맞느냐는 것이다.

   

 

한마디로 제사를 몇 대까지 모셔야

한다는 법은 없다.

조상의 제사 대수는 예로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우리나라는 관습적으로

4대 봉사를 당연시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4대를

제사 지낸 것은 아니다.

유교식 제례를 처음 수용한

고려 말에서 조선 초까지만 해도

신분과 지위에 따라

봉사 대수가 달랐다.

고려 때 4품 이상의 대부는

3대 조상을 제사하고,

6품 이하는 2대 조부모까지,

7품 이하의 하급 관원과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다.

.

그러다 조선시대로 넘어오면서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까지 봉사하고,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내도록 했다.

    


이를 조선 왕조 법전인에

명문화하여 거행토록 했다.

하지만 당시엔 조상의 제사를 주관하는

당사자의 신분에 따라 봉사 대수를

결정했기 때문에 시행상 혼란이 따랐다.

예를 들어 6품 관직에 있을 때는

3대까지 제사를 지내다가

관직이 없는 자식이

제사를 모시게 되면 부모 제사만

지내야 하는 모순이 생겼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양반의 경우

4대까지 제사를 지냈다.

양반 숫자가 크게 늘어난 말기에는

일반 서민까지도

모두 4대 봉사를 하게 되었다.

4대 봉사를 하지 않으면

상놈 소리를 듣기까지 했다.

일제가 의례 준칙을 만들어

기제사는 부모와 조부모 2대까지만

지내도록 강제했지만 대부분

4대 봉사를 했다.

오늘날은 예전처럼 4대 봉사를 하는

집안은 그리 많지 않다.

그래도 어느 누구도 상놈 집안이라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옮긴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