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조선왕릉 이야기

청정지역 2019. 12. 15. 20:20
    ♣ 조선왕릉 이야기 ♣


    조선왕릉을 가리켜 ‘신들의 정원’이라고 하지요 길지 중의 길지를 택해 종류별 다양한 나무를 조경했고, 석인상·석수를 비롯한 각종 돌조각품 출입문과 재실 같은 부속시설 등으로 능역을 꾸몄어요 조선왕조는 역대 27명의 임금과 왕비, 추존왕의 무덤들이 있으며 이 중 반정으로 축출된 임금인 연산군과 광해군은 능 지위가 아닌 묘(墓) 지위에 있어서 왕릉으로 불리지않고 묘(墓)로 분류되었지요 또한 이들 두 임금은 반정으로 쫓겨난 전적이 있어서 서울 종묘(宗廟)에도 모셔지지 않았으며 조선왕조가 멸망하는 시기까지 묘(墓)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어요 수도를 한양(漢陽)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대부분의 조선왕릉은 특히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분포되어있지요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라 한양도성 외에도 가까운 경기도 지역에 왕릉을 조성하게 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왕릉들은 경기도에 분포되어 있어요 이 중 선정릉(宣靖陵), 정릉(貞陵), 헌인릉(獻仁陵) 등 일부 왕릉은 원래 경기도 지역에 있다가 1945년 해방 이후 경기도에서 서울특별시 권역에 편입된 왕릉들이지요 6대 임금인 단종이 안장된 장릉(莊陵)은 원래 노산군묘로 분류되어서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군에 안장되었으나 19대 임금 숙종이 단종을 복위시키고 노산군묘를 장릉으로 승격하면서 비수도권 지역 중 유일한 조선왕릉이 되었어요 2대 임금인 정종은 원래 개성시에 왕릉이 있기 때문에 추존왕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능과 함께 북한 지역에 있는 왕릉이 되었지요 조선왕릉은 추존왕을 포함하여 총 42기가 있으며 원(園)은 15기, 묘(墓)는 86기가 있어요 "왕릉박사"라 불리는 이창환 상지영서대 교수는 조선왕릉을 가리켜 “당대 최고의 사상가, 철학가, 문장가, 조각가, 조경가가 합심해 지은 신의 정원”이라고 말했지요 조선왕릉은 왕과 왕비의 영면을 위한 공간일 뿐 아니라 현대인들에게도 쉼터가 되는 곳이지요 봉분 앞 장명등을 기준으로 장명등 안쪽이 왕과 왕비를 위한 공간이라면 바깥은 후손들을 위해 마련됐어요 이 교수는 “왕릉을 이런 식으로 구성하는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죽은 자는 물론 산 자에게도 똑같은 휴식과 위안을 준다는 것이 조선왕릉의 탁월한 점”이라고 했지요 조선왕릉은 200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어요 얼마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조선왕릉 종합학술조사 보고서’를 10년 작업 끝에 9권으로 완간했지요 보고서를 토대로 역대 주요 조선왕릉을 살피고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볼께요 참고로 능(陵)은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된 왕과 왕비, 황제와 황후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의 사친(왕을 낳은 후궁이나 왕족), 왕세자와 왕세자빈, 왕세손, 황태자와 황태자비의 무덤이지요 묘(墓)는 나머지 왕족(대군, 군, 공주, 옹주, 후궁)과 폐왕의 무덤 등 이지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健元陵)이지요 태조를 조문하러 조선에 온 명나라 사신들이 이곳 산세를 보고 “어찌 이와 같이 하늘이 만든 땅이 있을 것인가? 반드시 인위적으로 만든 산형 같다”고 감탄했다고 하지요 조선왕릉은 도성으로부터의 거리, 주변 능역과 거리와 산세 등에 따라 입지를 결정했어요 왕이 제례를 올리고 하루 안에 도성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거리를 계산 궁궐을 중심으로 반경 10리밖(4㎞), 100리(40㎞) 안으로 정했지요 좌청룡·우백호와 안산과 주산 등을 두루 따졌어요.


      건원릉 봉분이지요 다른 왕릉과 달리 억새를 심은 것이 눈에 띄지요 고향 함흥을 그리워한 태조를 위해 함흥 억새풀을 가져다 조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요


        때로 왕릉 입지는 정쟁의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어요 중종의 두번째 왕비인 장경왕후의 희릉(禧陵)이지요 중종때 이조판서를 지낸 김안로가 원래 서울 서초구 내곡동에 있던 것을 무덤 밑에 큰 돌이 깔려있다고 상소해 1537년 지금의 고양 서삼릉으로 천장(이장)했어요 김안로는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천장을 이용했지요 일찍이 김안로는 중종의 딸인 효혜공주를 며느리로 맞은 후 권력을 남용하다 탄핵을 받고 유배에 처해졌어요 재기 후 그는 정적들을 제거하는데 골몰했고 여기서 나온 것이 희릉 천장이었지요 자신을 유배시킨 자들이 바로 22년전 희릉 국장 때 책임자들이었던 것이지요 김안로의 계획대로 옥사가 벌어졌고, 정적들은 죄인이 되어 자손들까지 옥에 갇히는 변고를 당했어요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길지가 흉지가 되고, 흉지가 길지가 되기도 했어요 영조와 정순왕후가 묻힌 동구릉 원릉(元陵)은 원래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었던 곳이지요 능침에 틈이 생기고 빗물이 스며들어 자리가 나쁘다며 1673년 현종이 효종의 영릉을 경기 여주 세종대왕 능 옆으로 옮겼어요 그러나 1776년 정조는 효종 영릉이 있었던 자리에 할아버지 영조의 능을 조성했지요 이때 풍수가들은 영조 원릉의 자리 즉 옛 효종 영릉터를 두고 “귀하 별이 내려와 비추는 길지” “진실로 만세토록 무궁한 땅”이라고 극찬했어요 불과 1세기 만에 풍수가들의 말이 극과 극으로 달라진 것이지요


          중종의 왕비이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의 태릉(泰陵)이지요 문정왕후는 중국의 측천무후와 비견될 만큼 생전에 위세가 대단했어요 그 때문인지 태릉의 위용은 여느 왕릉 못지않아요 조선초기 왕릉에만 세웠던 병풍석을 봉분 둘레로 둘렀지요 태릉에서 보아야 할 것은 높이 314㎝에 달하는 석인상(石人像)이지요 장경왕후 희릉 석인상과 더불어 조선왕릉 석인상 중 가장 큰 석인상이지요


          <조선왕릉 학술보고서> 6권 24쪽에 보면 조선시대 의례를 규정한 <국조오례의>가 있는데 왕릉 석인상 높이는 태조 건원릉과 비슷한 170㎝로 정해져있어요 그러나 세조 광릉 석인상(244㎝)을 기점으로 점점 커져 16세기 희릉(禧陵)과 태릉(泰陵)에서 정점을 찍었지요 석인상의 크기는 이후 17세기 초 숙종 대에 들어 다시 줄어들었어요 태릉의 석물 규모는 조선시대에도 매우 이례적으로 비춰졌던 모양이에요 <선조실록>을 보면 문신 한준겸이 “석물은 정해진 척수가 있어 가감할수 없는 것인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커져서 강릉·태릉의 석물은 매우 큽니다”라고 아뢰자 선조가 “건원릉과 헌릉(태종 릉) 등의 석물을 자로 재어와 <오례의>에 정한 척수와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 유명한 광릉수목원이 있는 세조 광릉(光陵)이지요 세조는 풍수지리에 관심이 대단했던 왕으로 알려져 있어요 세조는 생전에 자신의 광릉 묫자리를 직접 정했지요 광릉은 태조 건원릉과 문종 현릉이 위치한 동구릉 지맥선이 들어오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어요 동구릉보다 먼저 풍수생기를 받을수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고 산줄기 아래에 있는 동구릉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의미가 있다는 풍수 해석도 있지요 조카를 죽이고 적통을 흔들어 즉위한 왕으로서 사후 자신의 후손들에 대한 염려가 반영된 것일까요? 세조는 “내 죽으면 속히 썩여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지요 이 또한 명당기운을 직접적으로 받으려는 의도로 풀이되고 있어요.


          또 세조는 서오릉을 조성한 왕이기도 하지요 세조가 자신보다 먼저 죽은 세자를 덕종으로 추존하고 그를 위해 무덤을 조성하면서 서오릉의 역사가 시작됐어요 동구릉 지역은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히지만 세조는 이곳을 쓰지 못했지요 태조와 문종이 묻힌 동구릉은 일종의 조선왕조 장자계승의 선산이었어요 그 자신 장자가 아니었고, 적통인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가 동구릉을 쓰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해석이 나오지요


          사도세자 융릉(隆陵)이지요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아버지의 능명을 세자의 예에 따라 영우원(永祐園)이라 했지요. 이후 정조는 아버지의 능원을 현재 화성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顯隆園)이라 했어요 현륭원은 도성 10리밖, 100리 안 원칙을 무시하고 조성한 사례이지요 정조 자신이 최고의 길지를 추천받아 신하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택지했어요 100리 안 원칙이 나오자 키 큰 장정들만 모아 걸음을 크게 잡은 뒤 화성은 100리 이내라고 주장했다고 하지요 옛날에는 거리측정을 보통사람의 발걸음으로 측정하였는데 정조는 키 큰 사람들을 시켜 큰 보폭으로 거리를 측정하여 100리 안이라 우겼다고 하지요 현륭원은 이후 고종때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능호도 융릉(隆陵)으로 바꾸었지요


          융릉 석물이지요 정조는 융릉의 석물을 조성하는 데에도 유달리 공을 들였어요 당대 최고의 장인 정우태를 뽑아 석물 조성을 감독하게 했지요 석자재 또한 정우태가 골라 온 것들을 정조 자신이 직접 살펴보고 최고의 것으로 다시 골랐어요 <일성록>을 보면 1798년 융릉(당시 현륭원)에 행차한 정조가 정우태에게 “석물의 제도는 장릉(인조릉)과 같으나, 더욱 뛰어나게 만든 솜씨가 최천약(영조 때 석수)에 밑돌지 않는다. 그때 정우태가 좋은 꿈을 꾸어 이 돌을 얻었다. 네가 바라던 일이 아니었느냐?”라고 이르자 “꿈에 한 신령이 나타나 화산의 옥돌 가운데 옥이 있다고 알려주어 깨어나서 구하였더니 과연 4개의 대석을 머리를 조아리고 얻었는데 이 혼유석과 장명등이 모두 이 돌입니다”라고 답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영조의 원비인 정성왕후가 묻힌 홍릉(弘陵)이지요 생전의 영조는 정성왕후 곁에 묻히기를 원해 먼저 세상을 떠난 정성왕후의 능역을 조성하면서 능침 오른쪽을 비워두었지요 쌍릉을 염두에 두고 병풍석까지 둘렀어요 그러나 정조는 할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영조를 동구릉내에 안장했지요 정조가 아버지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할아버지가 미워서 그러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있어요 한편으로는 영조 승하 후에도 살아있던 계비 정순왕후가 영조를 원비인 정성왕후 곁에 묻는 것이 싫어서 그렇게 됐다는 이야기도 있지요 사유가 어찌됐든 간에 영조는 정순왕후와 함께 원릉에 묻혔고 정성왕후의 홍릉은 영원히 오른쪽을 비워놓은 채 지금도 외로이 남아있어요


          조선왕릉 종합학술보고서 실무를 맡아 온 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특히 가볼 만한 왕릉으로 추천한 곳이 선조의 목릉(穆陵)이지요 목릉은 언덕 3곳에 선조와 의인왕후, 인목왕후를 각각 모신 동원삼강릉으로 각 능침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돌길을 따라 거니는 것은 목릉 답사의 즐거움 중 하나이지요 사진에 보이는 돌길은 ‘신로’라고 하는데 황 연구사의 설명에 따르면 정자각에서 재례를 올릴 때 능에 묻힌 왕과 왕비의 혼령이 길을 따라 오실수 있도록 깔아놓은 길이라 하네요 목릉은 임진왜란 이후 왕릉제도를 재정립한 계기가 된 능이라고 하지요 전쟁 직후 혼란기라 조선인 풍수사를 구하지 못해 중국에서 초빙한 풍수사가 왕릉 입지를 정한 웃지못할 사연도 목릉에 얽혀있어요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의 온릉(溫陵)이지요 경기 양주에 있는데 온릉은 황 연구사가 숨은 명소로 꼽는 곳이지요 적막하고 고즈넉한 풍광이 다른 왕릉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아취를 전하고 있어요 황 연구소는 “사방이 조용해 시간이 정지된듯 하고, 이따금 새소리만 울리는 곳”이라며 “온릉에 홀로 서 있으면 무덤 아래 묻힌 왕후와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듯 하다”고 했어요 단경왕후는 왕비가 된지 7일 만에 역적의 딸로 연좌돼 폐출된 비운의 인물이지요 온릉은 비공개릉이지만 조선왕릉 서부지구관리소에서 허가를 받아 방문할수 있어요
          -* 일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