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왕족들의 공동묘지

청정지역 2019. 12. 15. 20:14


▲ 서산 명종대왕의 태실 ...


    ◇ 왕족들의 공동묘지 ◇


    경기도 고양시의 대표적인 문화재는 135만평에 달했던 서삼릉(西三陵)이었지요 지금은 고작 8만여평의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곳에는 예릉(睿陵)과 희릉(禧陵), 효릉(孝陵) 외에도 의령원(懿寧園), 소경원(昭慶園), 효창원(孝昌園)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있는데 어느날 부터 태실(胎室)과 공주와 옹주, 후궁들의 공동묘지가 만들어 졌지요 왕족의 공동묘지라니? 그런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 매우궁굼 했지요 우선 이곳을 가려면 서삼릉 정문에서 차를 타고 마을과 음식점을 지나 빙 둘러서 가야 하지요 그것도 비공개 지역이라 공익요원이나 서삼릉 관계자의 안내를 받아 자물통으로 굳게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하지요 우선 제일 먼저 태실(胎室)을 만나게 되지요 이 지역은 태실과 공주 왕자의 공동묘지, 폐비 윤씨의 회묘로 나뉘어 있어요 먼저 왕들의 태실은 검은색 비석으로 되어 있고 역시 검은 비석의 왕자태실이 중간 오른쪽 공주, 옹주들의 태실은 흰 화강암 비석들로 들어차 있지요 이 모습은 마치 외국의 싸구려 공동묘지의 급조된 묘비들처럼 을씨년스럽기 까지 하지요 태실(胎室)이란 태봉(胎封)이라고도 하며 왕세자와 세손, 왕자, 공주, 옹주들이 태어나면 전국의 명산을 골라 태가 들어 있는 태항아리를 묻은 곳을 말함 이지요 어머니 자궁속의 태아에게 생명줄이었던 태를 소중히 여긴 이유는 자신과 후손에게 태를 통해 감응(感應)한다는 믿음 때문이었지요 명당에 묻어야 태에서 지기(地氣)를 받아 자신의 일생이 복을 받고 후손발복(後孫發福)이 된다는 풍수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이었지요 조선왕조실록에 여러 차례 언급될 정도로 태실의 중요성을 강조 하였는데 문종실록을 보면 '태장경(胎藏經)에 귀인이 되고 안 되고는 태(胎)에 달려 있다'고 하였지요 태를 언제 안장하느냐를 3월·5월·3년·7년 등 6가지로 시기를 구분해서 묻기까지 했으니 그 믿음이 어떤했는지 짐작할만 하지요 태실은 왕릉과 달라서 도성에서 백리 이내를 고집하지 않았기에 전국의 명당을 골라 석실을 만들어 묻었고 이를 위해 지수사(풍수를 보는 관리)를 파견하기도 하였어요 또한 태실 근처에 일정한 거리를 두어 수호군(守護軍)으로 하여금 백성의 출입과 벌채, 개간을 금하였으며 전국의 명당을 왕실에서 차지해 훌륭한 왕재가 태어나기를 바라기도 했지요 안태사(安胎使)가 태를 봉송하는 일을 맡았고 선공감(繕工監)에서 태실을 만드는 일을 했으며 봄·가을로 제사를 지내며 근처에 사찰을 지정하여 복을 빌게 하기도 했지요 현재 태봉(胎峰)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은 조선왕실의 태실이 있던 자리로 보면 틀림이 없어요 서삼릉 태실에는 일제가 전국에서 모아들인 역대 왕의 태실 22기와 왕자와 공주의 태실 32기가 있어요 조선왕조가 멸망한 1910년 일제는 망조왕실을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11월에 일본 궁내성 소속 이왕직(李王職)이라는 기관을 설치했지요 이왕직이 제일먼저 행한것이 조선왕조를 이씨조선(李朝)이라 폄하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여 지엄한 왕실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일에 몰두 했지요 우선적으로 민족의 정기를 말살하는 계획부터 세웠으며 그 첫번째로 전국의 명당에 묻혀 있던 조선왕실의 태실을 한곳에 집장 관리한다는 명목으로 파헤쳐 이곳으로 모아들였어요 서삼릉 태실은 나라를 빼앗긴 운명이 어떤한가 보여주는 치욕의 현장이기도 하지요 그런데 일본에 증오심을 갖고 있던 어떤 사람이 태실 비석 뒷면에 소화(昭和) 몇 년에 옮겼다는 기록을 박박 긁어 없애버렸어요 물론 국호를 잃어버린 원통함 때문에 행한 일이겠지만 이 때문에 언제 옮겨졌는지 기록이 모두 지워졌지요 얼마나 통한의 한이 서렸으면 비석마다 뒷면에 '소화 몇 년' 글자들은 남김없이 없애 버렸을까요?.... 공동묘지 비석 같은 태실을 한 바퀴 둘러보자 마지막 공주였던 덕혜 옹주의 태실이 보이지요 뒷면에 창덕궁에서 옮겨왔다는 것이 새겨져 있고 옮긴 날자는 훼손돼 있어요 일제의 태실 집장은 민족정기말살 정책에 국한되지 않았지요 태실을 모아들이는 과정에서 태를 담았던 항아리인 태호가 모조리 가짜로 바꿔치기 당했지요 왕릉의 부장품과는 달리 태를 담는 항아리는 훌륭한 국보급 백자였는데 이것을 탐낸 일제의 도적질은 태실의 집장에서도 한몫 했어요 도자기 전쟁이라 일컬어지던 임진왜란에 이어 일본의 끈질긴 도자기 도적질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많은 도자기들이 일본에 유출되고 태실 도자기까지 도난 당하는데 이른 것이지요 이왕직의 태실 집장은 도자기를 바꿔치고 도적질하는데 일본 관료들이 앞장섰음을 증명하고 있지요 왕릉에는 원래 후궁, 왕자, 공주의 묘를 쓸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을 집중 관리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두 모아놓은 것이지요 이렇게 왕릉과 함께 후궁, 왕자, 태실을 모아놓은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으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이었지요 세계 어느나라에도 없는 왕자와 공주의 공동묘지 ... 그 옆에 자리한 후궁의 묘 ... 일반인들 묘에도 못 미치는 작은 무덤들이 촘촘히 들어선 공동묘지를 보면 초라하다 못해 기가 막히지요 어찌 이토록 철저하게 유린당했는지 ... 한눈에 봐도 이건 아니지요 이것이 과연 존귀한 몸이었던 왕자와 공주들의 묘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분노가 솟구쳐 올랐어요 똑같은 크기의 모양의 무덤 ... 공장에서 찍어낸 듯 똑같은 묘비들이 마치 공동묘지와 다를바 없었지요 거기다 원래 왕릉에는 다른 묘가 들어설수 없음에도 일제가 의도적으로 왕릉의 품위와 존엄성을 낮추려는 책략에서 서삼릉에 이런 짖을 한것이지요 그러나 나라를 되찾고 주권을 회복한지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문화재청은 무얼하고 있는지? 이 공동묘지를 돌아보다가 공릉의 장순왕후가 낳다가 죽었던 인성대군의 묘를 발견했어요 어머니 장순왕후가 이 무덤을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 것인가. 30여 기의 공주와 왕자들의 묘비 뒷면에 새겼던 천묘한 날짜 역시 훼손돼 있어요 돌에 새겨진 이 많은 날짜를 일일이 다 지우려면 하루 이틀 걸렸을 것도 아닌데 모조리 없앤 것을 보면 지운 사람이 내리쳤을 망치와 끌의 광기가 느껴져 섬뜩해지기까지 하지요 아마 문화재청에서 관리하기 이전 방치됐을 무렵에 행해진 일일 것이지요 왕실이 망하니, 하루아침에 잠들던 곳에서 끌려나와 초라한 모습으로 공동묘지에 묻힌 신세가 된 혼령들도 기가 막혔을 것이지요 왕실 품위 낮추기를 의도한 일제의 계산은 이 공동묘지를 보면 철저하게 성공했다는 것이 느껴지지요 초 겨울 석양에 쓸쓸하고 초라하게 우르르 몰려 있는 무덤들의 모습을 보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그 자리를 도망치듯 떠나버렸어요 -* 일송 *- ★ 왕실 공동묘지 ...


    ▲ 서삼릉의 태실. 태조 이성계와 태종, 세종대왕의 태실이 보이지요 ...



    ▲ 숙종태실과 뒷면 ...


    ▲ 왕자들의 태실 ...


    ▲ 공주와 옹주들의 태실 ...


    ▲ 경기도 가평군 군내면에서 천봉했다는 기록이 적혀있는 태실 뒷면에 날짜가 지워져 있어요...



    ▲ 덕혜옹주 태실 창덕궁 기록이 남아있는 덕혜옹주 태실의 뒷면...


    ▲ 왕자와 공주들의 공동묘지...


    ▲ 인성대군 묘...



    ▲ 태실 안내판 ...


    ▲ 조선 역대왕 태실 왼쪽에 있는 검은 비석은 오석비군으로 조선왕들의 태실을 따로 모아 놓은 것이지요 조선왕 19기와 장조(사도세자) 1기, 영친왕 1기, 왕세자(이구) 1기 등으로 총 22기가 모아져 있어요 단종과 연산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철종, 고종 등 8기의 태실은 다행이도 이곳에 없네요...


    ▲ 조선 왕가 태실군 우측엔 화강암비로 만들어진 대원군,대군,공주,옹주 등 조선 왕가들의 태실이 모아져 있지요 알만한 인물들 덕흥대원군, 의소세손, 문효세자, 덕혜옹주, 페비 윤씨, 인성대군 등이 있어요 ...


    ▲ 비석의 뒷면 뒷면을 보면 우측 상단 부분이 일정하게 깎여 있는 흔적을 볼수 있는데 이는 충정어린 민초들이 일본의 연호를 삭제한 것이라 하네요 ...


    ▲ 태실의 전경 ...



    ▲ 왕자와 공주 묘역과 안내판 ...


    ▲ 깨진 묘비들과 뒷면 ...


    ▲ 왕자 공주 묘역 전경 가운데 장명등 하나, 혼유석 하나에 양 옆으론 망주석 2개와 문인석 2개가 놓여있지요 보통 대군묘에 준하는 상설인데 원래 대군묘는 원(園)의 규모와 맞먹거나 똑같이 해야 하지요 그런 묘역을 일제는 집장관리한다는 미명아래 이곳으로 집단으로 옮기고 원래 있던 터는 모두 팔아먹었다고 하지요 직접 보면 봉분이 굉장히 소박해서 얼핏보면 마치 유골함 단지를 묻은 정도가 연상되는데 조선시대 일반 서민들도 저렇게 작은 봉분은 없어요 이는 지극히 의도적인 것으로 조선왕실을 폄하하려는 의도에서 만든것으로 울분을 자아내게 하네요 ...



    ▲ 후궁묘역 곡장과 안내판 ...


    ▲ 후궁묘역 숙원이 한명 끼어 있지만 내명부 품계로 봐선 정2품과 종2품만 따로 모아놓은듯 하지요 봉분 앞엔 혼유석과 향로 그리고 묘비가 하나씩 놓여 있어요 그런데 어찌하여 중간에 완화군 이선의 묘가 끼어 있는지요? 완화군은 고종의 첫번째 아들로 그 만큼 총애를 독차지 했으며 세자로 책봉될뻔 했으나 후궁이 낳은 서자 출신이란 신분 때문에 그리 환대 받지 못하고 10대의 어린나이에 일찍 요절했지요 제일 마지막에 천장된 것으로 보이는데 일제늠들이 그냥 막 끼워 맞춘듯 하네요 ...


    ▲ 후궁묘 비석 이 묘역에 있는 상석과 비석은 모두 원래의 것이라 하지요 위에 두개는 숙원 장씨와 숙의 김씨 묘비의 뒷면이고 아래 두 개는 완화군 묘비의 뒷면과 앞면이지요 이곳에도 일본의 연호는 삭제 되었고 완화군 묘비 뒷면엔 월곡동에서 천장된 내용과 그의 일대기가 기록돼 있어요 ...



    ▲ 또 다른 후궁묘역과 안내판 이곳에는 그 유명한 경빈 김씨와 덕혜옹주의 생모인 귀인양씨의 묘가 눈에 들어 오지요 종 2품 밑으론 보이지 않으므로 좀 지체높은 후궁들이 모여 있는 곳인듯 하네요...


    ▲ 후궁묘역 이곳에는 후궁들 16기가 잠들어 있는 묘역으로 일제의 만행이 만든 묘역인데 후궁 묘역을 둘러보면 유독 큰 묘비가 눈에 띄는데 경빈 김씨의 묘비이지요 ...


    ▲ 대한 경빈김씨지묘 헌종과의 로맨스로 유명한 경빈 김씨의 묘이지요 경빈 김씨를 예로들어 내명부 품계를 잠깐 설명하자면 내명부 품계 중 상궁은 정 5품이고 그 이상부턴 종 4품인 숙원부터 후궁의 품계가 시작되는데 이때 후궁이 자손을 생산하면 바로 빈이나 귀인 같은 정1품이나 종1품으로 승격하게 되지요 예를 들어 영조의 모친인 숙원 최씨처럼 숙원인 종 4품으로 시작하여 연잉군을 낳고부터 바로 품계가 올라 숙빈 최씨가 되는 것이지요 때론 죽은후 추증 되기도 하지만 경빈 김씨처럼 내명부의 품계를 무시하고 왕의 총애를 받아 바로 빈의 자리에 오른 후궁도 있어요 참고로 숙종땐 왕후가 많이 바꾸었는데 장희빈의 일로 정국이 혼란해지자 숙종이 직접 내.외명부법을 수정하였는데"앞으론 후궁이 왕후가 될수 없다'고 국법을 바꿔버렸지요 그래서 숙종 이후부터는 후궁이 왕후가 된 사례는 찾아볼수 없어요 경빈 김씨의 원래 묘는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씨가 있던 휘경원 근처에 있었으나 어찌하여 광복후 이곳으로 천장했다고 하네요 경빈 김씨는 후궁으로 간택되어 들어와 헌종의 사랑을 독차지 했지요 창덕궁 낙선재를 지어 경빈과 시와 사랑을 나눴고 낙선재 안에 석복헌을 지어 그녀의 거처를 따로 마련해주기도 했지요 하지만 헌종임금이 젊은 나이(22)에 승하하자 순원왕후와 신정왕후를 극진히 모시고 헌종의 계비인 효정왕후에게도 예를 다했으며 늘 검소한 모습으로 왕실의 참모습을 보여줘 타의 모범이 되는 삶을 살았다고 하지요 묘비에 대한이란 칭호는 그녀가 장수하여 77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가 고종때 이므로 국호가 대한 이었지요 고종은 순화궁이란 궁호를 내리고 직접 제문을 지어줄 정도로 왕실에서 존경받는 여인이었다고 하네요 ...


    ▲ 경빈 김씨의 사당인 순화궁 터 순화궁(順和宮)은 한성 중부, 현재의 관훈동 194번지 자리에 있었던 궁으로 조선 중종이 순화공주를 위해 지어 주었기에 ‘순화궁’이라 불렸다고 하지요 순화궁은 헌종 때에는 경빈 김씨의 사저가 되었지요 그런데 이완용이 1907년 집을 화재로 잃고 일제로부터 순화궁을 받았지요 이완용은 순화궁을 전세로 주어 태화관이 되었는데 아이러니컬 하게도 이곳이 3·1운동 때에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곳이지요 이를 1921년에 감리교선교부가 매입하였고 1938년에 한국식 건축양식을 살린 건물을 신축하여 사용하다가 일제 말에 징발, 해방후에 경찰서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태화기독교사회관으로 운용되었지요 태화기독교사회관은 1980년 도시개발계획으로 헐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 지금의 태화빌딩이 들어섰어요 ...


    ▲ 회묘에서 바라 본 후궁묘역 조선의 후궁들은 특별히 권력을 행사하거나 왕을 배출한 몇몇 후궁들을 제외하곤 그리 알려지지 않은게 사실이고 왕의 첩이란 이유로 역사에서조차 그리 회자되지 못했지요 원래 후궁들은 선조 전까지는 궁에서 아이를 낳을수도 없었고 궁에서 죽을수도 없었어요 보통의 후궁이나 승은상궁들은 무척 외로운 삶을 살았는데 원래 죽으면 고향 땅에 묻히거나 부모가 있는 묘역에 안장되었지요 그러나 한시대를 주름잡았던 후궁들인데 이렇게 집단으로 모셔져 있다는 건 우리의 왕실전통이나 민족정기에도 맞지 않은 것이지요 이런 광경은 세계 어디에서도 보지 못할 웃지못할 광경이고 부끄러운 광경임에 틀림이 없어요 더군다나 이렇게 비공개 지역에 숨어 후손들에게조차 무시당하며 움츠리고만 있을 영혼을 생각하면 이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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