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어스름 해지는 저녁이면
하늘도.
구름도.
바다도.
어스름 물이 든다
담밑에 키재기를 하고 있는
봉선화를 따다가
백반 조금 넣고 절구에 빻는다
언니하고 동생하고 평상위에
둘러앉아 내가 먼저 할거라며
손가락 키재기를 한다
그렇게 손톱위에 올려진 봉선화 위에
비닐을 씌우고.
그리고 행여나 도망갈까봐
명주실로 꽁~꽁 매여 주기를 여러번.
이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데.
밤새 이리 저리 뒤척인다.
행여나 빠져서 도망가지 않을까
어느새 꽁~꽁 싸맨 손가락 끝이 아려온다
그렇게 아침이 되고.
손가락 끝에 매달려 밤새 숨도 쉬지 못하고
꽁~꽁 감겨있던 비닐을 벗겨보니.
쪼글..쪼글 할머니 손이 되어 있다
밤새 곱게 물들인 봉선화 물..
첫눈이 내릴때까지 봉선화 물이 남아 있으면
첫사랑도 몰랐던 어린 아이는
첫사랑이 이루어 진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를 믿으며.
늦가을까지 작은 가슴 설레고.
행복한 기다림으로
곱게 물들었겠지
봉선화
우리가 저문 여름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도종환 시인/시선집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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