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야담) 대밭골

청정지역 2015. 7. 13. 08:44

 

 

 

대밭골엔 딱 두 집이 살고 있다. 윗집인 단아한 기와집엔 이초시가 살고 아랫집 초가삼간은 부채다 대바구니다 죽부인을 만들어 장에 내다 파는 대근이네 집이다. 얌전한 양반 선비 이초시와 우락부락한 상것 대근이는 서로 어울릴 턱이 없지만 부인네 둘은 가까운 사이다. 삼십대 초반의 대근이 마누라는 이초시 부인보다 두 살 아래인 데다 서로 가문이 달라 마님이라 부르며 깍듯이 대한다.

 이초시 부인은 부잣집 맏며느리 같은 우아하고 덕스러운 자태에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띠며 입이 무거워 말을 아낀다. 얼굴이 제법 곱상한 대근이 마누라는 수다쟁이다.

“마님, 제 얘기 한번 들어 보세요. 글쎄, 쌍놈 아니랄까 봐 툭하면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를 퍼붓고 이렇게 사람을 개 잡듯 두드려 팹니다. 방물장수한테 대바구니 한두름 주고 박가분 한통 샀다고 그 지랄을 떨지 뭡니까.”

멍든 눈에 달걀을 문지르며 “아이고 내 팔자야. 그 짐승하고는 못살겠어요” 하자, 이초시 부인은 바느질하며 빙긋이 웃기만 한다. 대근이 마누라가 이초시 부인을 붙잡고 늘어놓는 수다의 8~9할은 제 남편 흉보는 일이다.

대근이 마누라는 이초시가 도포자락을 펄럭이며 걸어가는 걸 먼발치에서 보며 너무나 멋진, 너무나 양반티 나는 모습에 반해 찔끔 가랑이를 조이며 혼잣말을 한다.

“하루를 살더라도 저런 남자와 살아야 하는데….”

어느 날, 대근이가 부채와 죽부인을 가득 지고 외장을 나가며 마누라에게 “서너군데 장을 돌다 사나흘 후에 돌아올 것이여. 문단속 잘 하고 있어” 하며 새벽같이 집을 나섰다.

이튿날 점심 나절, 윗집의 이초시 부인이 내려왔다.

“마님, 어쩐 일이세요?”

“친정어머니가 편찮으시다는 전갈을 받고 친정 가는 길이네. 수고스럽지만 자네 남편 저녁상 차려 준 후에 우리 집에 올라가 우리 남편 저녁상도 좀 차려 주게나.”

“마님, 걱정 마세요. 마침 우리 신랑은 외장을 나가 사나흘 후에나 옵니다. 초시어른 세끼 식사는 제가 차려 드릴 테니 얼른 친정에나 다녀오세요.”

저녁 나절, 대근이 마누라는 자기 집 씨암탉 한마리를 잡아 이초시 집으로 갔다. 대근이 돌아와 물으면 족제비가 물어 갔다고 둘러댈 참이다. 이초시는 푸짐한 저녁상을 받고는 적이 놀랐다. 더 놀란 것은 저녁상을 물리고 나자 대근이 마누라가 분내음을 풍기며 술상을 들고 온 것이다. 마주 앉아 술을 따르는데 과히 싫지는 않다.

밤은 깊어 가고 소쩍새는 우는데 적막강산 대밭골엔 단 두 사람뿐. 술상을 치우고 이부자리를 펴 주고 술 취한 이초시가 쓰러지자 대근이 마누라는 촛불을 끄고 치마끈을 풀었다.

“에게게.”

대근이 마누라는 한숨을 토했다. 가느다란 두 다리 사이에 열살 아이 자지만한 걸 억지로 세워 놓았더니 서너번 깝작깝작하고는 나뒹굴어져 코를 고는 게 아닌가. 그 잘난 이초시라는 사람이….

“그나저나 마님한테 큰 죄를 지었네.”

중얼거리며 옷을 추슬러 입고 집으로 내려온 대근이 마누라는 그만 남편이 그리워진다.


“내 신랑이 으뜸이야. 마님이 불쌍하네. 그런 사람을 신랑이라고 데리고 사니. 쯧쯧쯔.”

 그 시간, 대근이는 삼십리 떨어진 청풍장터의 객줏집 구석진 방에서 술상을 치우고 뒤꼍 우물가에서 멱을 감고 와 벽에 기대어 담배를 물고 있었다. 똑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장옷으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들어왔다.

 바로 이초시 부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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