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에서 단 한명을 뽑으라면

우리나라 역사상

아니 전 세계적으로 봤을때에도

최강의 장수로 군림할 수 있는

 

척준경을 뽑을 수  있습니다.

 

 

한국 역사를 떠나 세계사 전체를 보더라

혼자 힘으로 전장을 휘젓고

패배하는 전투를 승리로 뒤바꾸는 힘을

가진 장수는 항우나 리처드 1세 정도 뿐입니다.

 

 

 

 

오늘은 고려의 소드마스터

척준경의 위대한 7가지 전설과도

같은 업적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아래 기록은 출처는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서

발췌한 기록입니다.

(척준경의 초상화는

전해 내려오지 않고 있으므로

각종 일러스트 및

영화 이미지를 넣었습니다.)

 

 

 

 

 

전설과도 같은 업적 1.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다가 임간이 대패하여

군진이 무너졌을 때 당시 중추원별가였던

척준경이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다.

 

 

 

 

 

 

전설과도 같은 업적 2.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하여 별무반의 앞길을 가로막자

윤관이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부관이었던 척준경이 이르기를

'신에게 보졸의 갑옷과 방패하나만

주시면 성문을 열어 보겠나이다' 라고 호언하였다.

척준경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추장과 장군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성문을 열어 고려군이 성을 함락하였다

 

 

 

▲고려 기병 상상도

 

 

 

전설과도 같은 업적 3.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협곡을 지나다가 5만에 달하는

여진족의 기습에 고려군이 다 무너져

겨우 1000여 명만 남았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

척준경이 즉시 1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에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이르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으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사내의 의

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고 소리치며 우뢰와같은 기합과 함께

100여기의 기병과 여진족의

후미를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은 단숨에 여진족 부관 10여명을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거꾸러 뜨렸다.

척준경과 10명의 용사들이 분투하여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하고 윤관은 목숨을 건졌다.

 

 

 

 

 

 

전설과도 같은 업적 4.

 

 

여진족 보병과 기병 2만이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고려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윤관과 임언이 방어만 하려고 하자,

척준경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로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은 다하여

원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찌합니까.

공들은 지난 날의 승첩을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또 죽음을 힘을 다하여

싸울터이니 청컨데 공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십시오."

 

  

척준경이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분전하여 적의 선봉장을

참살하고 적들을 패주시켰다.

 

 

 

전설과도 같은 업적 5.

 

 

척준경이 방어하고 있던 성이 포위되고

군량이 다해가자 지휘를 부관에게 맡기고

척준경은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사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원군을 부르고 당도하여

원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던 여진족들을 격파하였다.

 

 

 

▲사진출처 - 역사저널그날

 

 

전설과도 같은 업적 6. 

 

 

1126년 5월, 이자겸이 인종을 시해하려

수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인종이 달아날것을

우려하여 자객 다섯명을

어전(왕의 거처)으로 미리 보내었다.

 

 

어전 내부는 유혈이 낭자하여

내시와 궁녀들이 살해당하였다.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 에워싸려 하자

인종은 대경실색하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 순간 어전문이 통째로 박살나며

한 거구가 손에 피묻은 거대한 태도를

든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들어섰다.

거구는 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인종을 향해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신 척준경이 왔사옵니다! "

 

 

척준경의 갑옷은 이미 한차례 전투를 벌였는지

넝마가 되어있었고, 투구는 고사하고

상투가 잘려 봉두난발이 되어있었다.

  

 

척준경은 즉시 인종을 등 뒤로 숨기고

자객들에게 달려들어 두명을 베어넘기고

삽시간에 나머지 세명 모두

죽이고 인종을 구하였다.

  

 

이 공으로 인종은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 동덕

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하였다.

 

 

 

 

 

 

전설과도 같은 업적 7.

 

 

 

길주에서 윤관과 별무반

2만명이 3만의 여진족과 맞닥뜨렸다.

 

 

 

 

윤관은 급히 대열을 갖추고 적을 맞을

준비를 하였으나 이상하게도 적들은

대열만 갖추고 있을 뿐 돌격해 오지를 않았다.

 

 

 

윤관이 의아해 하던차에 여진족의 후미에서

붉은 깃발을 든 무리가 나와 고려말로

외치기를 " 우리 추장께서는 많은 피를

보시는 것을 꺼리신다.

 

 

 

추장께서 일기토를 신청하니

너희 고려인 중에 인재가 있다면

어디 한번 우리 여진족 장수

올고타와 상대해보아라 " 라고 하였다.

 

 

 

고려인을 조롱하는 말을 듣고 대노한

윤관이 당장 싸움에 임하자고 응수했다.

 

 

 

윤관은 휘하 장졸 중 무술이

가장 뛰어난 두충을 불러 내보내었다.

 

 

 

순간 여진의 무리가 반으로 갈라지며

족히 8척 3치(193cm)는 되어보이는

어마어마한 거한이 앞으로 나왔다.

 

 

 

두충은 큰소리를 치며 대번에 창을 휘둘러

올고타의 목을 찔러갔으나

창이 올고타의 왼손에 잡히며

한칼에 목이 달아나고 말았다.

 

 

 

그토록 무력이 뛰어나던 두충이 어이없이

한칼에 목이 잘리자 여진족은 기세등등하게

고함을 질렀고 별무반은 사기가 죽어버렸다.

 

 

 

이에 윤관은 사기를 회복하고자

다른 장수를 찾았지만 두충이 패하는 것을

본 장수들이 모두 그를 기피하였다.

 

 

 

그 때 ,부관으로 보이는 8척(180cm)이

넘어보이는 거구가 앞으로 나서 윤관에게 소리쳤다.

 

 

 

 

"신은 척준경이라 하온데, 소관을 보내주시면

저 무례한 오랑캐의

목을 베어오겠나이다 " 라고 하였다.

 

 

 

척준경은 거대한 태도(太刀)를 쥐고

한가운데로 성큼성큼 걸어나갔다.

 

 

 

이에 올고타가 코웃음치며

곡도(曲刀)를 휘둘러왔다.

척준경이 양손으로 태도를

잡고 피하지 않고 부딪쳤다.

 

 

 

놀랍게도 한칼에 올고타는

곡도를 놓친채 손목을 부여잡았다.

이에 척준경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양손으로 도를 잡은 채 횡(橫)으로

도를 휘둘러 올고타의 허리를 베어버렸다.

 

 

 

반대로 별무반의 사기가 크게오르고

여진의 사기가 땅에 떨어졌다.

 

 

 

이에 척준경을 상대할 만한 장수가 없었던

여진은 물러갔고 이 일로 윤관의 총애를

받은 척준경은 공로가 조정에

보고되어 장수로 승진하였다.

 

 

고려 예종 때 북방영토를 개척했던

윤관의 명성은 오늘날까지

한국사 최고의 장수로 손꼽히는

척준경의 뒷받침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척준경은 윤관이 조련시킨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에 나서 고려군이

위기에 봉착했을 때마다 빼어난 활약으로

활로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고려는 여진족과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력이 쇠진하고,

 

 

 

 

요나라와의 국경분쟁 문제까지 불거지자

김인존의 제안에 따라 애써 설치한 9성을

여진족에게 반환하고 만다.

 

그 때문에 고려의

영토 확장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척준경은 전공을 인정받아 요직에 기용되었다.

척준경은 그때부터

당대의 권력자였던 이자겸과

손잡고 정적들을 물리치면서 실권을 거머쥐었지만

그 과정에서 임금을 위협하고 대궐을 불태우는

 

 

 

 

실수를 저질렀다.

그 후 척준경은 십팔자요언에

현혹된 이자겸이 왕위를 찬탈하려 하자

인종의 뜻을 받들어

그를 제거함으로써 공신에

봉해지고 벼슬이 최고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문신 정지상의 탄핵으로 하루아침에 실각한

뒤 이자겸과 함께 역신으로 규정되었다.

파란만장했던 그의 생애는

《고려사》 열전에 수록되어 있다.

 

 

헌걸찬 무장으로 역사에 등장하다

 


곡산 척씨의 시조인 척준경(拓俊京)은

황해도 곡주에서

검교대장군 척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연도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곡주의

아전 출신이었다.

그 역시 빈곤한 집안 사정

탓에 서리가 되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다행히 계림공 왕옹의 종자로 들어갔는데,

 

 

 

1095년(숙종 즉위년) 계림공이 왕위에

오르면서 이속직인

추밀원별가(樞密院別駕) 벼슬을 얻었다.

 

1104년(숙종 9년) 1월, 동여진의 추장 오아속이

여진 통합을 시도하면서

두만강 북부의 여진족을

차례차례 복속시켰다.

 

그 과정에서 통합을 거부하고

오아속의 부하 석적탄에게 쫓기던 여진족 추장 1

4명과 1753명의 백성이 고려에 귀순했다.

 

그 중에는 고려에 우호적이었던

부내로 부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자 석적탄은 반역자들을

내놓으라며 정주성을 포위했다.

 

 

 

 

급보를 받은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동북면행영병마사로 삼아 출동시켰다.

이때 척준경은

임간의 부관으로 출전했다.

 

그해 2월 임간이 함흥

방면으로 섣불리 군사를 내보냈다가 여진 추장

연개의 기습을 받아 군사의 태반을 잃었다.

 

그때 척준경은 적장 한 명의 목을 베고 포로

두 명을 되찾아오는 등 무용을 과시했다.

 

하지만 패전 소식을 듣고 분개한 숙종은 임간을

비롯하여 황유현, 송충, 왕공윤, 조규 등을 파직했다

 

 

 

 


 

 

 

 

. 이때 척준경 역시 하옥되었다가

그의 활약상을 알게 된 윤관에 의해 풀려나

천우위 녹사참군사로 임명되었다.

 

그해 3월 숙종의 명으로 윤관이

여진족 토벌에 나섰지만 석적탄에게 대패하고

고려에 망명했던 여진족 추장

14명과 변방의 통치기관인 14개의

단련사를 넘겨주는 치욕을 당했다.

 

윤관은 보병 중심인 고려군 편제는

여진족을 이기기 힘들다는

사실을 깨닫고 숙종에게 상주하여

기마병 중심의

별무반을 설치한 다음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윤관과 함께 여진정벌에 나서다

 

숙종에 이어 보위에 오른 예종은

부왕의 유업을 받들어 1107년(예종 2년)

윤10월 윤관을 상원수,

 

오연총을 부원수로 임명하고 17만 명의 대군을

동원하여 여진 정벌을 시작했다.

 

이때 척준경은 병마녹사로서 중군병마사

좌복야 김한충의 휘하에 있었다.

 

그해 12월 고려군은 전군을 3군으로 편성한 다음

여진족 경내에 들어가

공격하는 체하다 물러난

적진에 사자를 보내 예전에 사로잡은 허정과

나불 등 여러 추장들을 풀어준다고 통보했다.

 

이에 여진족이 400여 명의 호송 병력을 파견하자

척준경은 김부필, 최홍정과 함께

그들을 모조리 척살했다.

 

 

 

 

그와 같은 모략으로 기선을 제압한 고려군이

여세를 몰아 북진하자

여진족은 보동음성으로

물러나 농성에 들어갔다.

 

이에 고려군이 맹공을

퍼부었지만 석성에서 여진족의 반격을 받아 위기에

처하자 윤관은 척준경에게 지원을 명했다.

 

수하를 이끌고 석성으로 달려간 척준경은

가파른 성벽을 기어올라

적진에 들어간 다음 엄청난

용력을 발휘하여 적을 일대혼란에 빠뜨렸다

 

. 때맞춰 좌군이 총공격을 펼쳐 석성을 함락시키고

여진족 1,200명을 척살했다.

아울러 중군과 우군이

합세하면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의 전투에서 고려군은

여진족의 수급 1만여 개를 얻었고,

동여진의 추장 요을대를 비롯하여

3230명의 적을 생포했다.

 

고려의 숙원이었던 두만강 이남 지역 점령에

성공한 윤관은 동쪽으로 화관령,

북쪽으로 궁한이령,

서쪽으로 몽라골령을 국경으로 정하고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공험진 6성에 백성들을

이주시켰다. 이듬해에는 진양 등지에 3성을

더 쌓아 이른바 9성을 완성했다.

 

빼어난 무용으로 전공을 독차지하다

 

윤관이 9성을 구축하고 점령지를 고려의

영토로 삼자 여진족이 극렬하게 반발해

각처에서 전투가 빈발했다.

당시 9성 지역은

너무나 광활해서 한 지역이 공격당하면

다른 성에서 지원하기 힘들었다.

 

1108년(예종 3년) 1월, 윤관이 오연총과 함께

정병 8000여명을 데리고 가한촌 골짜기를

통과하다가 매복하고 있던

여진족의 급습을 받았다.

 

그로 인해 고려군이 전멸당하고 도원수 윤관과

오연총을 비롯해 10명만

버티는 지경에 이르렀다.

급보에 접한 척준경이 결사대를 이끌고

구원하려 하자

 

아우 척준신이 이대로 출전하면

개죽음을 당할 뿐이라며 말렸다.

그러자 척준경은 이렇게 대답했다.

 

 

“너는 돌아가서 늙으신 아버지를 봉양해라. 나는

나라에 한 목숨 바쳤으니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서둘러 전장에 다다른 척준경은 앞뒤 재지 않고

적진에 난입하여 순식간에 10여 명을 죽였다.

 

그의 놀라운 무용에 질려버린

여진족의 전열이 흐트러졌다.

때맞춰 최홍정과 이관진의 구원병이

도착하여 윤관과 오연총을 구출하는 데 성공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윤관은

영주성으로 돌아온 뒤 척준경의

공로를 치하하면서 정7품

합문지후로 승격시켜 주었다.

 

 

 

 

 

얼마 후 여진족이 기병과 보병 2만여

명을 동원하여 영주성을 포위하자 윤관,

임언, 오연총 등이 농성하고자 했다.

 

하지만 성중에 군량이 부족했으므로

척준경은 일전불사를

외쳤다. 평소 척준경의 용맹을 신뢰하고있던

윤관이출전을 허락하자

그는 수하들과 함께 성밖으로 나가더니

 

순식간에 적병 19명을 척살했다.


그의 기세에 깜짝 놀란 여진족은

병력을북쪽으로 물렸다.

척준경은 이때의 공훈으로 공부원외랑에

임명 되었다.

 

위기를 넘긴 윤관은 다음 작전을

논의하기 위해중성대도독부(中城大都督府)로

제장들을 불러 모았다.

그때 권지승선 왕자지가

공험성에서 도독부로 이동하다가 여진족 장수

사헌의 기습을 받았다.

 

급보를 받은 척준경

이 달려가 여진족을 물리치고 왕자지를

구원했다. 그때 왕자지가말을

잃고 허둥거리자 그는

여진족 병사의 말을 빼앗아전해 주기까지 했다.

 

 

그해 2월 여진족 장수

우야속이 대군을 이끌고 웅주성을 포위했다.

최홍정이 성문을 열고

나가 일전을 벌인 끝에

승리를 거두었지만 적의 대오는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상황이 위급

해지자 척준경은 병졸로 위장한 다음

밧줄을 타고 성벽을 내려정주성으로 달려갔다.

 

윤관으로부터 원군을

지원받은 그는통태진지나 야등포에서

길주에 이르는 동안 수차례 전투를 벌여

여진족을 격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