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재여부재 와 안빈낙도

청정지역 2017. 1. 15. 18:15

              


      ◇ 재여부재(材與不材)와 안빈낙도(安貧樂道) ◇ 향설해(香雪海)라는 말이 있어요 "향기로운 눈의 바다"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이 말은 하얀 매화가 지천(至賤)으로 피어있는 것을 가리키는 옛 관용구 이지요 그 말 자체로 세상에서 가장 짧은 한 편의 시가 될수있다 했지요 조선후기 시인(화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은 매화나무 사이에 다락을 짓는 것을 향기로운 눈 바다에 누각을 띄운다(香雪海中宜泛樓)라고 표현했어요 그 멋들어진 표현을 한 사람이 지은책이 향설관척독초존(香雪館尺牘鈔存)이지요 그 책에는 의미있는 "계숙에게(與季叔)"란 글이 있어요 “돌의 무늬나 나무의 옹이는 모두 그 물건이 병든 곳이지요. 하지만 사람들은 이를 아낍니다. 사람이 재주를 지님은 나무나 돌의 병과 한 가지입니다. 자신이 아끼지도 않건만 다른 사람이 아끼는 바가 됩니다. 하지만 오래되면 싫증을 내며 도리어 평범한 돌이나 보통의 나무가 편안하게 아무 탈 없는 것만 못하지요. 사람의 처세는 재(材)와 부재(不材)의 사이에 처하는 것이 좋습니다. (石有暈 木之癭 皆物之病也 而人愛之 人之有才 木石之病 不自愛而 爲人所愛 久則見壓 反不如凡 石閒木之 自存無恙矣 人之處世 可將處材不材之間 ) 이는 햇무리진 돌은 수석(壽石)으로 대접을 받아 좌대위에 모셔지고 나무의 울퉁불퉁한 옹이는 사람으로 치면 암세포같은 종양(腫瘍)인데 이런것이 많아야 분재(盆栽)감으로 높이 쳐준다는 뜻이지요 그뿐인가요? 없는 옹이를 만들려고 철사로 옥죄고 좌대에 앉히겠다며 멀쩡한 아래 부분을 자르기도 하지요 나무나 돌의 입장에서는 큰 재앙을 만난것이나 다름없어요 게다가 사람들은 금방 싫증을 내지요 얼마 못가서 좀더 신기한 것이 나오면 거기에 혹해 거들떠 보지도 않아요 재주를 파는것은 늘 이렇다 하는군요 붕 떳다가 어느 순간 급전직하(急轉直下) 추락하고 말지요 그때가서 평범한 돌이나 보통의 나무를 부러워한들 때는 늦었지요 장자 산목(山木)편에 재여부재(材與不材)란 말이 나오는데 즉 쓸모 있음과 쓸모 없음의 사이에 처하란 뜻이지요 어느날 노스승과 제자가 길을 가는데 산길 옆 큰 나무를 목재꾼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고 지나 갔어요 연유를 묻자 옹이가 많아 재목으로 못쓴다는 대답이 돌아 왔지요 그날밤 스승과 제자는 객주집에 묵었어요 주인이 닭를 잡아오라 했는데 하인이 물었지요 “잘우는 놈과 못우는 놈 중 어느 놈을 잡을까요?” 하니까 주인이 “못우는 놈을 잡아라” 했어요 이튼날 길을 나선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지요 “스승님 어제 나무는 쓸모가 없어 살았고 닭은 쓸모가 없어 죽었습니다 스승님은 어디에 처하시렵니까? “ “응 ~ 나? 나는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 처 할란다 그런데 그 중간은 얼핏 욕먹기 딱 좋은 곳이긴 하지“ 라고 말씀 하셨지요 그래요 언제나 그 재주가 문제 이지요 남달리 뛰어나도 문제 이지만 너무 우둔해도 문제인 것이지요 요즘 세태는 너무 편협해도 문제 이지만 속없이 나불거리는 그 입(口)도 문제이지요 과연 그 중간은 어디쯤에 있는것인지 ~~~ 엇그제 현시국이 너무 어수선하고 좌우로 양분화되어 있어 답답한 나머지 "탄핵정국과 양시양비론"이란 제목으로 재여부재(材與不材)의 글을 올렸더니 무차별적 비판이 쏫아 졌어요 양시양비론 처럼 둘다 옳고, 둘다 그를수 있다는 생각을 하루 빨리 공유한다면 극단주의, 배타주의에 치우쳐 미움과 갈등, 다툼과 분쟁을 벌이고 있는 우리사회는 서로 양보하고 이해할수 있는 공동선을 찾을수도 있지 않을까해서 올려는데 이건 아니었어요 오로지 "도"아니면 "모" 내편이 아니면 적이라는 이분법적 극단주의와 내것만 옳고 남의것은 다 그르다는 이기주의 적인 의견만 팽배하여 재여부재(材與不材) 즉 중도는 설곳이 없더군요 오로지 타협은 없고 투쟁만 있을뿐이라는 것을 실감 했어요 이렇게 끝도 없고 길도 없는 기차길 같은 평행선만 달려 가면서 자기편 논리만 옳고 객관, 상식적이고 유일한 정의라는 것이지요 양시양비론, 중립적 자세는 비겁하며 사회발전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아닌 비판을 서슴치 않고 있어요 어찌하면 좋을런지요? 황소가 아무리 힘이세도 외나무 다리에선 힘을 못쓰고 물고기가 아무리 빨라도 뭍에서는 거북이 보다 느리다는 사실을 왜 모를까요? 사물은 언제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다르게 보일때가 있어요 거기서 해답을 찾을수도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재여부재(材與不材) 중도가 필요한 것인데 .... 옛말에 삼인문수(三人文殊)라는 말이 있어요 3인이 모여 논하면 지혜를 다스리는 문수보살과 같은 좋은생각이 떠오른다는 말이지요 우리 모두 이 난국을 타개 하기위해선 지혜를 모아야 하지요 태산같은 자부심을 보이다가도 풀잎처럼 누울때도 있어야지요 아니면 모두가 나몰라라 백년하청(百年河淸)이나 해야 되나요? 황하가 맑아지기만을 기다린다는 뜻인데 천년을 붉게 물들인 황하가 백년이 흐른들 맑아 질까요? 그래요 그저 손놓고 초야에 묻혀 안빈낙도(安貧樂道)나 하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가난한 처지이지만 평안한 마음으로 도를 지키며 즐긴다는 뜻이지요 -* (일송) *-





      ▲ 우리 모두의 마음에도 포근한 함박눈이 소복히 내렸으면 좋겠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