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연산군의 어머니..(폐비 윤씨)

청정지역 2017. 6. 7. 22:06

 연산군의 어머니..(폐비 윤씨)

                 

폐비윤씨는 누구인가?

폐비 윤씨는 판봉상시사 윤기견의 딸이며 연산군의 어머니이다.

1473년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면서 숙의에 봉해졌고,

성종의 총애를 받다가 1474년 공혜왕후 한씨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로 책봉되던 해에 세자 융(연산군)을 낳았는데, 투기가 심해 성종을 난처하게 하는 일이 잦았다.

1477년에는 극약인 비상을 숨겨두었다가 이 일이 발각되어 왕과 왕 주위의 후궁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빈으로 강등될 뻔했으나,

성종의 선처로 무마되었던 적이 있다.

이어 1479년에는 왕이 규방출입이 잦고 자신을 멀리한다 하여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게 된다.

이 일로 성종과 모후 인수대비의 격분을 유발하여 폐비되고 만다.

세자의 친모라는 이유로 대신들이 폐비를 반대하였으나 인수대비와 성종의 입장은 단호했다.

그래서 윤씨는 친정으로 쫓겨난 뒤 바깥세상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그녀는 자신의 행위를 뉘우치고 근신하며 지냈다.


그런데 1482년 조정에서는 그녀의 거처 문제가 새로운 정치 현안으로 떠올랐다.

즉, 장차 왕이 될 세자의 친모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상소가 이어졌고,

한편에서는 이를 반대하는 무리들이 윤씨를 비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폐비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녀에게 조정에서 따로 거처할 곳을 마련하여 주고 생활비 일체를 관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를 반대하는 측의 태도도 완강했다.

특히 성종의 모후 소혜왕후(인수대비)와 계비 정현왕후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성종도 쉽게 폐비에 대한 거처를 마련해줄 수 없었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가 성장함에 따라 이미 폐비 윤씨에 대한 동정심을 갖고 있던 터였다.

그래서 내시와 궁녀들을 시켜 그녀의 동정을 살펴오라 하였다.

그런데 이들 나인들과 내시들은 인수대비의 명에 따라 왕에게 폐비 윤씨가 전혀 반성의 빛을 보이지 않는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다.

성종은 이 말을 듣고 대신들에게 폐비 윤씨에 대한 문제를 논의하게 하여 사약을 내리기로 결정하고 그녀를 사사하였다.


사사한 이후 폐비 윤씨의 묘에는 묘비도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성종은 세자의 앞날을 고려해 '윤씨지묘'라는 묘비명을 내렸다.

그리고 장단도호부사로 하여금 절기마다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성종은 자신이 죽은 뒤 100년까지는 폐비 문제에 관해 논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겼다.

그러나 연산군은 이를 어기고 결국 갑자사화를 일으키고 말았다.

연산군은 즉위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윤씨의 폐비사건을 알게 되었고, 신원을 모색했다. 그

래서 1497년 그녀의 묘를 개장하고, 1504년에는 성종의 유명을 어기고 제헌왕후에 추궁했으며 묘도 회릉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위되자 윤씨의 관작도 추탈된 뒤 다시는 신원되지 못했다.

폐비 윤씨는 세자를 낳은 왕비이면서도 투기심과 부덕함으로 인해 폐비당했다가 결국 참극을 당하고 말았고,

이 폐비 윤씨 사건은 연산군의 폭정으로 이어져 급기야 조선 조정에 엄청난 살생극을 불러일으킨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 갑자사화(甲子士禍)-1504 ☆ [요약] 사화는 1504년(연산군 10)의 갑자사화(甲子士禍)이다.

갑자사화는 투기가 심하여 왕비(王妃)의 자리에서 쫓겨나 사약을 받은 성종의 비(妃) 윤씨(尹氏)의 소생인

연산군이 성종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된 후 생모(生母)에 관한 사실을 알게 되자,

폐비에 찬성한 신하들과 평소에 연산군의 학정을 불평하던 일부 사림파의 선비들을 한데 묶어,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서 일어났다.

이것은 무오사화처럼, 훈구 ·사림파간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선비가 많이 죽음을 당하였다는 의미에서 사화이다.


☆ [원인]

무오사화로 언론 기관의 기능이 완전히 상실된 상황에서 연산군의 국정 운영은 방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이제 사림이 완전히 제거된 마당이라 그에게 학문을 권하는 이도 없었고 간언을 하는 이도 없었다.

더군다나 대신들은 한결같이 연산의 비위에 맞는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조정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은 연산군은 향락과 패륜 행위를 일삼았다.

매일같이 궁궐에서는 연회가 벌어졌으며,

전국 각지에서 뽑아 올린 수백 명의 기생들이 동원되었다.

게다가 자신의 큰어머니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를 겁탈하는 등 종친간의 상간을 범하기도 했고,

여염집 아낙을 궐내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

이렇게 연산군의 사치와 향락이 심해지자 점차 국가 재정이 거덜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신들은 그의 행동을 비판하지 못했다.

오히려 연산군의 폭정을 기화로 권신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연산군이 국고가 빈 것을 알고 이를 메우기 위해 공신들에게 지급한 공신전을 요구하고,

노비까지 몰수하려 하자 대신들의 태도는 급변했다.

왕이 향락과 사치에 마음을 빼앗겨 급기야 자신들의 경제 기반까지 몰수하는 것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된 것이었다.

그들은 막상 왕의 요구가 자신들의 이해 관계와 맞물리자

왕의 처사가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그 동안 못마땅하게 여겨오던 왕의 지나친 향락을 자제해 줄 것을 간청하기 시작했다.


☆ [경과]

하지만 신하들 모두가 연산군에게 반발했던 것은 아니었다.

무오사화 이후 조정은 다시 외척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및 육조 중심의 부중파로 갈라져 있었다.

따라서 공신전을 소유하고 있던 부중파 관료들은 연산군의 공신전 몰수 의지에 반발하고 있었지만,

궁중파는 일단 왕의 의도에 부합하자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이번 대립을 이용하여 정권을 잡으려는 인물이 바로 임사홍이었다.

그는 일찍이 두 아들을 예종과 성종의 부마로 만든 척신 세력 중의 하나였다.

임사홍은 성종 시대에 사림파 신관들에 의해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사림을 싫어한 그는 연산군과 신하들의 대립을 이용해 훈구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일시에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임사홍은 우선 연산군의 비 신씨의 오빠 신수근과 손을 잡고 음모를 꾸미던 끝에

성종의 두번째 부인이자 연산군의 친모였던 윤씨의 폐비 사건을 들추어낸다.

폐비 윤씨 사건은 성종이 차후에는 거론하지 말라는 유명을 남긴 적이 있어 그 때까지 아무도 그 사건을 입에 담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임사홍은 이 사건의 내막을 연산군이 알게 될 경우

윤씨의 폐출을 주도했던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에게 동시에 화를 입힐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임사홍의 밀고로 윤씨의 폐출 경위를 알게 된 연산군은 엄청난 살인극을 자행한다.


☆ [결과]

연산군은 우선 윤씨 폐출에 간여한 성종의 두 후궁 엄귀인과 정귀인을 궁중 뜰에서 직접 참하고 정씨의 소출인 안양군,

봉안군을 귀양보내 사사시켰다.

그리고 윤씨 폐출을 주도한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아 부상을 입혀 절명케 했으며,

비명에 죽은 생모의 넋을 위로하고자 왕비로 추숭하고 성종묘에 배사하려 하였다.

연산군의 행동을 감히 막으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만 응교 권달수와 이행 두 사람만이 성종 묘에 배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

론을 펴다가 권달수는 죽임을 당하고 이행은 귀양길에 올랐다.

하지만 연산군의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막상 신하들이 자신의 행동을 저지하지 못하리라는 판단을 한 그는

윤씨 폐위에 가담하거나 방관한 사람을 모두 찾아내어 추죄하기 시작했다.

이 결과 윤씨 폐위와 사사에 찬성했던 윤필상, 이극균, 성준, 이세좌, 권주, 김굉필, 이주 등 10여 명이 사형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치형, 한명회, 정창손, 어세겸, 심회, 이파, 정여창, 남효온 등은 부관참시에 처해졌다.

이밖에도 홍귀달, 주계군, 심원, 이유녕, 변형량, 이수공, 곽종번, 박한주, 강백진, 최부, 성중엄, 이원, 신징, 심순문, 강형, 김천령, 정인인, 조지서, 정성근, 성경온, 박은, 조의, 강겸, 홍식, 홍상, 김처선 등이 참혹한 화를 입었으며, 이들의 가족 자녀에 이르기까지 연좌시켜 죄를 적용하였다.


이처럼 1504(연산군10)년 3월부터 10월까지 7개월에 걸쳐 벌어진 이 갑자사화는 희생자의 규모 뿐 아니라

그 형벌의 잔인함이 무오사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무오사화는 신진 사림과 훈구 세력 간의 정치 투쟁이었지만,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중 세력과 훈구, 사림으로 이루어진 부중 세력의 힘의 대결이었기 때문이다.

이 사화는 생모윤씨의 폐위, 사사사건이 직접적인 동기가 되고, 연산군의 포악하고 잔인한 복수심에서 폭발한 사건으로 보기 쉬우나,

그 내역을 살펴보면 조정 신하간의 암투가 이 사건을 조장, 격화시킨 것이 요인이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성종 때 양성된 많은 사림이 수난을 당하여 유교적 왕도정치가 침체하고 학계가 위축되었다는 점과,

연산군의 폭정과 만행은 성균관과 사원을 유흥장으로 만들고,

훈민정음의 교습과 사용을 금하는 한편, 한글서적을 모아 불사르는 등 문화의 정체와 인륜질서의 파괴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이 사화를 계기로 해서 심화된 연산군의 실정은 새로운 정치변동과 정치문화가 요청되어 마침내 중종반정이 일어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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