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조선 사회 알고보면 재미 있어요

청정지역 2017. 8. 3. 21:33
      조선 사회 알고보면 재미 있어요
      -신라에는 황금으로 만든 집이 있었다?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를 보면 '금입택'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금'이 쇠인지, 황금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금입택이 신라 후기 헌강왕 때 경주에서 가장 잘 사는 집임을 뜻하는 것임에는 틀림없고, 따라서 황금으로 해석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금입택에 사는 사람의 재산은 거의 재벌 수준이어서 웬만한 절 하나는 한 집안에서 너끈히 세울 수 있었습니다. 경주에는 이런 금입택이 경치 좋은 곳에 35채 있었다고 하네요. 그 중에는 김유신의 집(재매정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통일신라 전성기의 경주는 그야말로 부유한 대도시였습니다. 헌강왕 때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고, 노랫소리와 피리소리가 하루종일 이어졌다'고 삼국유사에 나와있죠. 834년 귀족들에게 사치생활 금지령이 내려졌습니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수레나 말 장신구, 집에 금을 못 쓰도록 한 거죠. 이것이 금입택이 황금으로 만든 집이었을거라는 또 하나의 증거입니다. 금입택에 사는 진골귀족들은 신라 초기에는 왕위를 독점하는 성골귀족들에 비해 한 단계 낮았습니다. 그런데, 선덕여왕의 사촌여동생 진덕여왕이 혼인을 하지 않아 사실상 성골의 대가 끊기자 김춘추 장군이 진골 출신 최초로 왕에 오르면서 진골들의 시대가 열립니다. 진골들은 성골들보다는 단계가 낮았지만 장관, 장군을 독점했고 나라로부터 막대한 땅을 하사받았습니다. 삼국통일 후에는 전공에 따라 막대한 보상, 전리품을 받았고 개인 병사를 키우기도 했죠. 신라 말기, 왕권 다툼이 심해지면서 왕권이 약해져 개인 병사가 있었던 진골 귀족들은 왕권으로도 통제하기 어려워질 지경에 이릅니다. 금입택의 진골 귀족들이 절을 만든 것도 자신들의 엄청난 재산을 합리적으로 빼돌리기 위해서였죠. -조선시대에도 그린벨트가 있었다? 맞습니다. 한양성 4대문을 기점으로 약 10리까지의 외곽지역(성저십리:성 밑 10리)이 그것인데, 성 안은 한양성이라고 했지만 그 외곽까지는 한성부라고 했습니다. 성저십리는 동쪽으로 흥인지문(동대문)-마장동 바깥 중랑천 부근, 서쪽으로 돈의문(서대문)-마포 망원정 근처, 남쪽으로 숭례문(남대문)-용산 등 한강변, 북쪽으로 숙정문(북대문)-북한산 인수봉까지였습니다. 이 성저십리에서는 소나무 베기를 금지했고, 산을 깎아 묘로 쓰는 것, 나무나 풀을 베고 태우는 것, 백성들이 나무뿌리를 캐 먹는 것, 돌을 채굴하는 것, 주택 건축 역시 모두 금지했습니다. 성저십리를 둔 이유는 첫째, 성 안 사람들에게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요즘보다 앞서가는 센스가 보이네요. 하지만, 성 안 사람들은 왕과 왕족, 높은 사람들과 양반들, 그 식솔들이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의 서울은 완전 소비도시였죠. 둘째, 성저십리는 왕실과 높은 사람들의 사냥과 놀이를 위한 곳이자, 일반 백성들의 접근을 막는 울타리였습니다. 사냥감을 보호하고, 놀이를 방해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각종 규제조치를 내렸던 거죠. 성저십리 안에도 사람들이 살았는데, 대부분 사대문 안에 농산물 공급하는 걸 일로 삼고 살았습니다. 아현동에선 미나리, 용산-이태원에서는 호박과 수박, 왕십리-뚝섬에서는 배추와 무를 생산했습니다. 오늘날, 그린벨트 안 사람들이 오랫동안 경제적 손실과 고통을 감수해야 했던 것처럼, 성저십리 사람들도 각종 규제 속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농업으로 생계를 꾸렸던 것입니다.
      -가발은 조선시대, 부(富)를 누리는 여인들의 센스
      가발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유행했는데, 당시 국제적 호평을 받아 중국에 수출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려 때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더 유행했죠. 조선시대에 들어와 가체(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려고 덧넣는 머리)는 부(富)의 상징이 되었고, 너도나도 이 멋진 가체를 쓰려고 기를 쓰기에 이릅니다. 머리 사치 때문에 집안 재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가체를 마련 못하면 시부모에게 예를 드리지 못하게 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1756년 영조는 양반집 여성들에게 가체 대신 족두리를 쓰라고 명합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족두리가 훨씬 사치스러워졌고, 1763년 영조는 다시 가체를 쓰라고 했습니다. 영조의 실패에 손자 정조가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했습니다. 가체를 금지하고 족두리를 쓰되 금, 은, 진주같은 걸로 장식하지 못하도록 하고, 머리를 땋아 쪽머리를 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가체 금지령은 빛을 보지 못했습니다. 쪽머리는 정조의 아들 순조 때 정착했죠. -조선시대, 노비들의 값은 말보다도 못했다? 1398년 태조에게 올린 보고를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노비의 값은 비싸봐야 오승포 150필에 지나지 않는데 말값은 4,5백필에 이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무릇 노비 값은 남녀 가리지 않고 15~40세까지는 400필, 1 4살 이하나 41세 이상인 자는 3백필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사람 목숨 파리 목숨만도 못한 전쟁 때는 노비 값도 더 떨어졌습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는 말 1마리, 노비 10명을 바꿨다고 하네요. 임진왜란 때 말1마리가 은돈 10냥(전투용 큰 말은 더 비쌈.)이었다니 노비 1명이 은돈 1냥에 불과했던 겁니다. 노비는 주인이 맘대로 사고팔 수 있었고, 재산상속 때는 노비 수를 세서 자식들에게 골고루 나눠줬습니다. 그래서 부모자식간에 생이별을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죠. 이후 19세기 동학농민운동 때도 소 1마리와 노비 5명(예쁜 계집종 1명 포함)을 바꿨다고 합니다. -18세기 인삼수출의 최대경쟁국은 미국이었다? 인삼은 우리나라에서 2천년 전부터 재배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국과의 무역에서 인삼은 우리나라 최대의 수출품이었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인삼이 재배된 건 17~18세기 중국과 밀무역을 하던 개성 상인들에 의해서입니다. 미국은 캐나다 몬트리올을 중심으로 한 동북부의 야생 인삼을 가지고 베이징이나 광동에서 우리나라와 경쟁했습니다. 야생이라지만 그 거대한 땅에서 캐왔으니 양이 많았죠. 그러나 무분별한 채취로 미국의 자연산 인삼 양은 점점 줄어듭니다. 결국, 경쟁에서는 우리가 승리했죠. 인삼을 바칠 것에 대한 조정의 가혹한 요구, 개성상인들의 발빠른 대응이 오히려 인삼 재배를 시작하게 해 미국과의 무역 경쟁에서 우리가 이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조선시대 관리들의 월급 조선시대 관리들은 1년 월급을 2~4회에 걸쳐 곡식으로 받았습니다. 월급 받을 때가 되면 8도 관리들이 와우산 자락(지금의 서강대 근처)으로 몰려들죠. 그들은 이조(지금의 행정자치부)나 병조(지금의 국방부)에 가서 패를 지급받은 다음, 패를 가지고 관리들의 월급창고라 할 수 있는 광흥창( 지하철역 지명에도 남아있죠)으로 가서 직접 월급을 받았습니다. 이 곳의 곡식은 전라도나 충청도산이었다고 합니다. 그럼 <경국대전>을 근거로 조선시대 관리들의 월급을 살펴봅시다. 정1품과 왕의 아들인 대군들: 쌀 100석, 옷감 32필(녹만 받아가지고는 부자가 될 수 없는 정도입니다. 깨끗한 관리로 이름난 청백리들이 낙향해서 살기 어려웠다는 부분이 이해가 되는군요.)을 받았습니다. 이러하니, 종9품 최하위 관리들이 받는 월급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쌀 14석, 옷감 4필이 전부입니다. 쌀 1석이래야 80kg 쌀 한 가마보다 적은 것이니 이것만으로는 식구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액수였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적게 주는데도 녹봉이 국가 재정의 절반까지도 차지했다네요. -우리의 오랜 상속전통은 장자상속이 아닌 균분상속 균분상속이란 똑같이 상속하는 것이죠. 조선시대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으며, 율곡 이이도 그에 따랐습니다. <경국대전>에 법으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죠. 이러한 균분상속은 17세기 말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여자도 출가 여부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상속을 받았고, 그것은 신라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전통이었습니다. 신라에서는 왕위계승에도 아들과 사위, 친손자와 외손자 사이에 차별이 없었고 고려, 조선에서도 그러한 전통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전통이 조선 중기 이후 무너지기 시작하는데, 제사를 모시는 데 따른 부담이 큰 작용을 했습니다. 사실 명문가라도 대대손손 출세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자녀가 많으면 날이 갈수록 재산이 줄기 마련이죠. 그에 따른 대책이 제사를 모시는 큰아들에 대한 상속을 늘리고 딸에게는 상속을 하지 않는 장자상속이었던 것입니다. 남녀 균분상속의 전통은 이후 수백년이 지나 1991년에야 민법으로 되살아나게 되었죠.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적 기업들
      박승직상점(지금의 두산): 19세기 말 유명한 거상 중 하나가 박승직입니다. 전국을 무대로 면직물 유통을 하던 그는 1896년 8월, 33세에 서울 배오개에 상점을 열었습니다. (박승직상점) 박승직은 두산그룹 창업주인 박두병의 아버지인데, 그가 연 상점은 한국 최초의 개인기업이었죠. 면직물을 팔았던 박승직상점은 사업이 날로 번창해 전국에 지점을 내게 되었고, 1925년 주식회사로 전환합니다. 박승직의 장남 박두병은 조선은행(지금의 한국은행)에 4년간 근무한 후 1937년부터 박승직상점 전무이사로 취임, 경영을 시작했고 1946년 두산상회로 상호를 바꿔 오늘날의 두산그룹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한성은행(지금의 조흥은행): 한성은행은 1897년 2월 지금의 안국병원 자리에서 문을 엽니다. 그 때 건물은 방 2개에 마룻방이 하나인 20평 초가집이었습니다. 방 하나는 은행장실이었고, 또 하나에는 은행원들이 업무를 봤습니다. 손님들은 마룻방에서 기다렸죠. 한성은행은 김종한의 한성전당포를 인수해서 시작했습니다. 은행장에는 고종 황제의 사촌 이재완, 부은행장에는 김종한이 있었습니다. 좌총무에 이보응, 우총무에 이완용의 조카 한상용을 두었죠. 주요 업무는 일본에서 돈을 빌려 그것을 다시 한국인들에게 대출하는 것으로 고수익을 올렸다고 합니다. 그러나 휴업을 했다가 1903년 공립한성은행으로 다시 설립되어 황실과 정부 재산, 금융업무 등을 하다가 1928년 조선식산은행에 흡수되었고, 1943년 동일은행과 합병해 오늘날의 조흥은행이 되었습니다. 동화약품: 부채표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품이 백년 전통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아시는 분 많지 않을 겁니다. 동화약품은 1897년 9월 서울 중구 순화동에 동화약방을 세우고 그 첫 작품으로 활명수를 내놓았던 것으로, 100년 역사를 가지고 있죠. 활명수 발명가는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로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접목시켜 만든 국내 첫 양약입니다. 그의 아들 민강이 아버지의 발명품을 만들고 팔기 위해 동화약방을 세웠죠 동화약방은 그 후 1937년 윤창식이 인수했고, 그 후에도 제약업을 고집하여 오늘날의 동화약품에 이릅니다. -돈 없어 결혼 못하면 국가가 보조금을 줬다? 조선의 독특한 제도 중 하나가 혼인보조금제도입니다. 혼인비용이 없어 30이 넘도록 혼인을 못하면 나라에서 비용을 주도록 한 법이죠. 그 비용은 호조(지금의 재정경제부)에서 댔다고 합니다. 나라에서 나서서 개인의 혼사까지 관여한 이유는 성종의 말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인륜의 도리는 혼인보다 중한 것이 없고, 제왕의 정사는 원녀, 광부가 없게 하는 것이 긴요하다" 원녀는 혼인을 못해 원한을 갖게 된 여인, 광부는 장년의 독신 남자입니다. 즉, 백성들이 혼인을 하지 못함으로 원한을 갖거나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않도록 하는 것이 왕의 중요한 정사의 하나라고 여겨졌던 것이죠. 또, 자연의 순리에 따라 사람도 적당한 때에 짝을 만나 음양의 화합을 해야 나라가 평안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나라의 안녕과 평안을 책임지는 왕이 가난한 백성의 혼인비용을 대주는 것은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 대상이 양반집 자녀였다는 데서 조선이 철저한 양반 중심 사회였다는 걸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