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까마귀 고기

청정지역 2018. 1. 27. 20:23

              

  까마귀 고기  



곽서방 새색시는 눈코 뜰 새 없다.
꼭두새벽에 일어나 대식구 아침식사 준비하랴,
설거지할 틈도 없이 새참 만들어 함지박에 이고
종종걸음으로 논매기를 하는 들판으로 달려갔다가
부리나케 집에 와 점심 준비하랴 바쁘다.
막걸리 걸러서 오후 새참 들고 가고
저녁 준비하고 별 보고 빨래하고 나면
삼베적삼이 땀에 절어 등짝에 척척 달라붙어도
멱 감을 힘이 없어 안방에 들어가 쓰러진다.
문제는 녹초가 되어 눕자마자 잠 속으로 빠져드는 
새색시의 하루 일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여름이라 식구들은 멍석을 깔고 마당에서도 자고
마루에서도 자고 안방에서도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자는데,
새색시가 답답해서 눈을 비벼 보면 신랑 곽서방이
그 육중한 몸을 덮쳐 쿵덕쿵덕 절구를 찧고 있었다.
치마를 올리고 고쟁이를 벗기는 것도 새색시는 몰랐다.
눈꺼풀은 천근만근 내려앉는데 곽서방의 절구질에
식구들이 깰까 봐 조바심을 내던 새색시도
마침내 곽서방을 안고 몸을 바르르 떨었다.
곽서방이 바지춤을 추스르며 제자리로 돌아가면
새색시는 새로 눈을 붙이는 둥 마는 둥 일어나
아침 준비를 해야 했다.

잠 한번 늘어지게 푹 자 보는 게 소원인 새색시는
걸으면서도 자는데 곽서방은 하룻밤도 빠지지 않고 
새색시의 잠을 뺏는 것이다.
밤이면 밤마다 잊어버리지도 않는 신랑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어 노심초사하던 새색시가 묘책을 떠올렸다.
새색시는 머슴을 시켜 까마귀 한마리를 잡아 왔다.
아침 수저를 놓고 머슴들과 들로 나가는 곽서방에게
새색시는 귓속말을 했다.
“점심상 가지러 머슴 보내지 말고 서방님이 직접 오세요.”
곽서방은 싱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새색시는 작은 솥에 
손질한 까마귀와 마늘을 잔뜩 넣고 푹 고았다.
점심때가 채 되지도 않았는데 곽서방이 집으로 왔다.

친정에서 인편으로 오골계 한마리를 보내왔더군요.”
지난 단옷날 씨름판에서 송아지 한마리를 타 온
장사 곽서방은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져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오골계탕(?)을 먹어 치웠다.
부뚜막의 점심상을 싸는 새색시를 곽서방이 뒤에서 껴안더니
치마를 걷어올리고 바지는 내렸다.
“어머머.” 새색시는 부뚜막에 두손을 짚고 땀을 흘렸다.
그날 밤, ‘까마귀 고기를 먹었으니 밤일하는 걸 잊었겠지’
하는 생각에 새색시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잠이 들었다.

      이럴 수가! 곽서방이 또 올라탔다. 하도 어이가 없어 “서방님, 조금 전에 했잖아요” 하니, 곽서방 하는 말 좀 보소. “내가 언제 했어?”

      (까마귀 고기먹고) 조금전에 한것은 잊어 먹었겠지.? ㅎㅎㅎ



  까마귀는 ‘불길한 새’일까?  


요즘은 까마귀를 ‘불길한 새’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까마귀가 항상 ‘불길한 새’였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까마귀는 오랫동안 ‘신성한 새’이거나 적어도 ‘대견한 새’였다. 까마귀가 ‘신성한 새’였던 것은 고구려 건국 신화에도 나온다. 까마귀는 고구려인들의 태양 숭배와 밀접히 관련돼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의 아버지 해모수는 태양신이다. 그가 아침마다 다섯 용이 끄는 마차(五龍車)를 타고 내려와 나라 일을 관장하다가 저녁이 되면 하늘로 되돌아 갔다고 한다. 해모수가 아침에 떴다가 저녁에 지는 태양신임을 묘사한 것이다.

주몽의 어머니 유화 부인은 태양에 의해 수태된다. 유화부인이 방에 있을 때 햇빛이 그녀를 따라가며 그의 몸을 비추자 잉태하고 닷되 가량의 알을 낳았다. 그 알에서 태어난 아이가 바로 주몽이다. 유화 부인을 임신시킨 것은 햇빛인데 어째서 ‘알’을 낳은 것일까? 그것은 태양이 까마귀를 암시하기 때문이다. 혹은 태양에서 뻗어나온 햇빛이 그 메신저인 까마귀에 의해 전달됐다고 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고구려인들은 그 건국 초기 부터 시조신으로서의 태양신과 시조새로서의 까마귀를 연결시켰다. 태양(陽)과 까마귀(烏)를 같은 것으로 보거나, 혹은 후자를 전자의 사자로 보는 설화를 흔히 양오(陽烏)설화라고 부른다. ‘태양 까마귀’라는 말이다.

고구려 왕족과 귀족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세발 까마귀’도 태양 까마귀이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는 네 방위를 지키는 사방신으로 청룡과 백호, 주작과 현무 같은 전설적인 동물들을 등장시켰다. 그러나 그들 위에는 항상 천하를 주재하는 태양과 함께 까마귀가 그려졌다. 그래서 고구려의 까마귀는 용이나 봉황 같은 전설적인 동물들 보다 한끗발 더 높은 새다. 고분 벽화의 태양 까마귀는 다리가 셋이었기 때문에 ‘삼족오(三足烏)’라고도 불렸는데, 여기서는 그냥 ‘세발 까마귀’라고 부르겠다.

지금까지 발굴된 거의 모든 고구려 무덤에서 ‘세발 태양 까마귀’가 발견된다. 쌍영총, 각저총, 덕흥리 1호, 2호 고분, 개마총(鎧馬塚), 강서중묘, 천왕지신총, 장천 1호분, 무용총, 약수리 벽화고분, 그리고 다섯무덤(오회분) 4호묘, 5호묘 등이 바로 그것이다. 무덤 벽화 뿐 아니라 출토된 고구려 금관의 장식에도 “세발 까마귀”가 등장하는 걸 보면 당시 고구려인들이 삼족오를 얼마나 신성하고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신성한 까마귀’ 이야기는 고구려에만 나오는 게 아니다. 신라에도 있고 백제에도 있다. 예컨대 신라 8대 왕이었던 아달라(阿達羅) 이사금 (154-184년)시절을 배경으로 한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에도 까마귀와 해가 동시에 나온다. 박인량(朴寅亮)이 지은<수이전(殊異傳)>에 실렸던 이 설화는 일연의 <삼국유사(1권 기이편)>와 서거정의 <필원잡기(2권, 신라수이편)>에 옮겨 전한다.

이 설화의 주인공인 연오랑과 세오녀는 이름에는 모두 ‘까마귀 오(烏)’자가 들어 있다. 해와 달이라는 ‘빛’에 관한 신화가 까마귀와 연결된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와 <필원잡기>에 나오는 연오랑의 한자 이름이 조금 다르다. <삼국유사>에서는 ‘연오(延烏)’라고 했지만 <필원잡기>에서는 ‘영오(迎烏)’라고 표기했기 때문이다. ‘연오’나 ‘영오’는 ‘양오(陽烏)’가 변한 것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또 ‘세오’라는 이름도 본래 ‘쇠오(金烏)’ 즉 ‘금까마귀’를 가리키는 것이었을 것으로 보는 이도 있다. ‘금’까마귀라고 해서 ‘누런’ 까마귀라고 보면 안된다. ‘환하게 빛나는’ 까마귀라는 뜻이다. 황금의 번쩍이는 모습이 햇빛을 닮았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아무튼 연오랑과 세오녀는 바위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왕과 왕비가 된다. 그런데 이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에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사신을 보내서 이런 사실을 알리자 세오녀가 스스로 짠 비단을 건네 주었는데 이 비단으로 제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이 설화에도 까마귀가 빛과 연관돼 있다. 고구려에 비해 태양 까마귀 숭배가 다소 약했던 신라에서 조차도 까마귀를 통해 일본에 빛(해/달)을 전해 주고 나라를 세워 준 것이다. 일본에는 지금도 까마귀를 길조로 여기는 전통이 남아 있다.

백제에도 신성한 까마귀와 태양을 연결시킨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유사 백제 편에 보면 비류왕 때(327년)에 “7월에 구름이 끼었는데, 마치 붉은 까마귀가 해를 양쪽에서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도 태양을 묘사하면서 까마귀를 등장시켰다. 아마도 고구려에서 시작된 태양 까마귀 숭배 사상의 여진이 백제에도 전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까마귀를 형요하는 색깔은 주로 셋이다. ‘검은’ 까마귀와 ‘금’까마귀, 그리고 ‘붉은’ 까마귀가 바로 그것이다. 태양 관찰이 발달했던 고구려는 일찌기 태양의 흑점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 흑점의 모습이 까마귀를 닮았다고 해서 ‘검은’까마귀를 태양의 사자로 보았다. ‘붉은’까마귀와 ‘금’까마귀는 모두 태양의 색깔이다. 아침이나 석양의 태양은 타는 듯 붉고 대낮의 태양은 금빛이다. 까마귀를 형용하는 색깔 조차도 모두 태양과 관련돼 있다.

태양 까마귀가 ‘신성한 새’로 취급됐던 것은 삼국 시대 뿐이 아니다. 고조선 시대에도 세발 까마귀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환단고기 (桓檀古記)의 단군세기(檀君世紀) 중, 8대 단군 우서한(혹은 오사함, 기원전1993-1985) 에 관한 기록에 보면 “갑인 7년(기원전 1987년)에 세발 까마귀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 넓이가 석자나 되었다 (甲寅七年 三足烏飛入苑中 其翼廣三尺)”는 기록이 나온다.

날개가 ‘석 자’라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자’의 길이가 지금과 같다면 ‘석 자’는 약 1미터에 달한다. 그게 한쪽 날개만 말하는 것이라면, 두 날개를 펴면 너비가 2미터나 된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왠만한 독수리에 견줄 수 있는 거대한 새다. 4천여년 전 고조선의 거대하고 신성했던 세발 까마귀는 지금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공원이나 전깃줄 위의 까마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는 말이다.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통해 ‘신성한 새’로 여겨졌던 까마귀는 통일 신라 이후 배척됐다. 중국과 지나치게 가까워진 덕분이다. 다른 글에서 또 보겠지만 중국의 한족은 까마귀를 아주 싫어했다. 오죽하면 요임금이 활을 쏘아 하늘의 태양을 떨어뜨리고 그 속의 세발 까마귀를 죽여버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겠는가.

그러면서도 한대의 <회남자>에 보면 세발 태양 까마귀가 가끔씩 땅으로 내려와 불로초를 뜯어 먹는다는 기록이 남아 있기도 했다. 까마귀가 꼴보기 싫은 새이기는 하지만 그게 불사조라는 점은 인정해 놓은 것이다. 아무리 짓밟아도 번번이 살아남아 번성하는 동이족에게 한족이 붙여준 일종의 라이벌에 대한 경의였는지도 모르겠다.

까마귀에 대한 중국의 적대감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서 반전된다. 청나라 문화에서는 다시 까마귀가 천제와 황제의 메센저로 복귀한다. 청나라의 첫 수도이자 오늘날까지 동북3성의 중심지인 심양(瀋陽)의 상징새는 지금도 태양 까마귀이다. 심양의 고궁에는 까마귀를 올려놓은 솟대가 하늘 높이 세워져 있다. 심양 시청 광장에도 태양조가 20미터는 족히 되는 날개를 펴고 있다. 심양 북역 광장에는 무려 50미터가 넘는 조형화된 태양조가 비상하고 있다. 심양 시내에는 현대적으로 디자인된 삼족오 벽화가 곳곳에 그려져 있다.

그러나 청나라를 제외한 그밖의 모든 한족 왕조에서는 까마귀를 무시하고 그 대신 봉황이나 대붕을 대표적인 상징새 혹은 길조로 채택했다. 중국의 까마귀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한번 하기로 하겠다. (특히 몽골족이 중원을 차지하고 세웠던 원나라의 기록은 확인해 보지 못했다.)

까마귀를 탐탁치 않게 여겼던 한족은 동중서의 음양오행론과 주희의 성리학을 가지고 까마귀의 신성과 의미를 대폭 깎아내렸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검은색은 북쪽을 가리키는 상서롭지 못한 색깔이다. 그것은 북방의 침입을 항상 두려워했던 한족의 우려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자는 <시경>에 나오는 까마귀를 흉조로 해석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주자가 배척한 그 현조는 까마귀가 아니라 제비일 수도 있다. 이 이야기도 중국 까마귀 이야기를 할 때 다시 한번 꺼내 보겠다.)

삼국시대에 신성한 새였던 까마귀는 통일 신라와 고려를 지내면서 그 의미와 상징성이 대폭 약화된다. 고려 건국 초기만 해도 왕건의 할아버지에 대한 설화에 까마귀가 등장하는 등 그 신성성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러나 고려말이 되면 까마귀는 그 검은 색깔 때문에 더러운 새로 취급받는다. 다음의 두 시조는 당시 정치적 입장이 정반대였던 사람들이 지은 것이지만 거기에 나오는 까마귀의 의미는 모두 같다.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 마라
성낸 가마귀 흰빛을 새울세라
청강에 잘 씻은 몸 더럽힐까 하노라.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 조차 검을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을 손 너뿐인가 하노라.


앞의 시조는 정몽주 어머니의 작품이라고 한다. 고려 왕조를 무너뜨리려는 역신들을 까마귀에 비유해 놓았다. 두번째 시조는 그 역신들이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해서 지은 시조이다. 자기들을 까마귀라고 비난하는 사람들을 위선자라고 거꾸로 낙인찍었다.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을 둘러싼 이데올로기 싸움이 까마귀를 중심으로 전개됐던 것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오면 까마귀의 지위는 약간 회복된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보다도 더 동중서와 주희를 숭상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까마귀의 ‘신성함’을 되살려 놓은 것은 아니다. 그저 검고 흉한 까마귀의 겉 모습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배울 미덕이 있다는 정도다. 그게 바로 까마귀는 ‘효도하는 새’라는 주장이다. 이 주제로 지어진 문학작품은 발에 채일 정도로 많지만 여기서는 시조 두 수만 예로 들어 보자.

가마귀 열 두 소리 사람마다 꾸짖어도
그 삿기 밥을 물어 그 어미를 먹이나니
아마도 조중증자(鳥中曾子)는 가마귄가 하노라

뉘라서 까마귀를 검고 흉타 하였던고
반포보은이 그 아니 아름다운가
사람이 저 새만 못함을 못내 슬퍼하노라


김수장이 지은 첫번째 시조에서는 까마귀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도마에 올랐다. (혹은 까마귀를 비난하는 내용이 열 두가지나 된다는 뜻일 수도 있다.) 박효관이 지은 두번째 시조에서는 검고 흉한 모습이 지적돼 있다. 기괴한 일이다. 고조선과 고구려의 까마귀는 그 검은 색깔 때문에 태양새로 불렸고 사나운 생김새 때문에 준오라고 불렸고, 그 시끄러운 울음소리 때문에 태양의 사자라고 불렸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까마귀는 생긴 것도 검고 흉칙할 뿐 아니라 울음소리 조차 재수없는 새로 고착돼 버린 것이다.

‘검고 흉칙하고 시끄러운’ 까마귀가 조선 시조의 소재거리가 된 것은 오로지 효도 때문이다. ‘반포’라는 말은 ‘거꾸로 밥을 먹인다’는 뜻이다. 어려서는 어미새로부터 먹이를 받아 먹지만, 커서는 거꾸로 어미새에게 밥을 먹인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들도 까마귀를 본받아서 부모님의 은혜를 갚으라는 말이다.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면 검고 흉칙한 까마귀만도 못한 존재라는 말이다.

까마귀가 정말로 어미새를 먹이는 지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다. 누가 그걸 실험해 봤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내가 사는 곳에는 까마귀가 많아서 한 동안 잘 관찰해 봤지만 새끼가 어미를 먹이는 것 같은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건 아마도 그냥 꾸며낸 이야기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한때 까마귀에게 부여됐던 신성함이 부정됐다는 점이다. 사실 ‘반포조’라는 말 조차도 중국 명나라 때 저술인 <본초강목>의 기록에 의존해 만들어진 것이다. 한족은 까마귀의 신성함을 거세시킨 다음, 자기들의 유교 문화 속에 얌전히 편입시켜 놓은 것이다. 동이족의 후예였던 조선 선비들은 아무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고 그것을 고분고분 받아들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나마 20세기에 들어오면 ‘대견한 새’라는 이미지 마저 없어지고 만다. 한족 문화에 이어 이번에는 서양 문화의 영향이다. 날개를 펴면 너비가 2미터나 되는 새까맣고 용맹스럽고 신성했던 까마귀는 이젠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한국인들은 지난 1천년 동안 세발 태양 까마귀를 서서히 질식시켜 죽여 버렸다. 지금 한국의 어린이들은 그리스 신화의 기괴한 동물에는 열광하지만 세발 까마귀를 보고는 아무 감흥도 일으키지 못한다. 어른들 사이에서도 ‘늑대’를 숭상하던 로마인들 이야기를 하면 ‘사해 동포주의자’가 될 수 있지만, 고구려의 ‘세발 태양 까마귀’ 이야기를 꺼내면 ‘편협한 국수주의자’ 소리를 듣게 된다.

까마귀 생각을 하면 이래저래 마음이 서럽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다.

 - 옮겨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