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 · 공부방

빈녀의 노래 / 허난설헌(許蘭雪軒)

청정지역 2013. 2. 27. 10:32







- 빈녀의 노래
- 허난설헌(許蘭雪軒),貧女吟 豈是乏容色 工鍼復工織 개시핍용색 공침부공직 少小長寒門 良媒不相識 소소장한문 양매부상식 手把金剪刀 夜寒十指直 수압금전도 야한십지직 爲人作嫁衣 年年還獨宿 위인작가의 연연환독숙 얼굴인들 남에게 빠지리 바느질 길쌈에도 솜씨 있건만 가난한 집 태어나 자란 탓으로 매파도 발끊고 몰라라 하네 손에 가위 쥐고 마름질하니 추운 밤 열 손가락이 곱아온다 남을 위해 시집갈 옷 짓지만 해마다 나는 홀로 잡니다 이 추운 겨울날에도 손으로 바늘을 잡고서 삯바느질만 하는 가난한 이 신세를 한(恨)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밤이 새도록 바느질을 하고 있으니 날씨가 하도 추워서 열 손가락이 빳빳하다. 그러나 이것이 내 옷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위하여 시집 갈 옷을 만들고 있으니 서럽기만 하다. 이웃 처녀들은 잘 살아서 일찍 시집을 가는데 나는 이웃 처녀들의 시집갈 옷만 만들어 주고 해마다 홀로 쓸쓸히 자고 있지 않은가. 나이는 들고 가난하여 중매장이도 찾아오지 않으니 언제나 시집을 가서 잘 살 수 있으려나. 가난하게 사는 것이 한이 된다. "빈녀의 노래"는 바느질로 날을 새워 옷을 지으나 집이 가난하여 시집을 못 가는 자신의 신세를 쓴 것이다. 요즘이야, 다들 생활수준이 높아지고 세월이 좋아지다 보니 삯바느질로 어렵게 살아가는 여인네들이 없지만 우리 어릴 적만 해도 동네마다 한두 집은 있었다. 명절이나 혼사가 있을 땐 일감이 밀려 밤을 새우기 마련이다. 삯바느질이지만 한 땀 한 땀 정성을 들이다 보면 며칠 밤은 꼬박 새웠을 것이다. 깊은 밤 졸다가 새벽닭 홰치는 소리에 깜짝 놀라 바늘에 그만 손가락도 찔렸을 것이다. 창 밖에는 그믐으로 가는 희미한 달빛이 댓돌 위에 내리고 문틈으로 들어온 바람이 문풍지라도 울리면 자신의 가난이 더 서러워 얼마나 눈물을 흘렸을 것인가. 지금 바같에는 밤바람 소리가 크게 들려온다. 우우, 우우.. 난설헌에게 `여류`라는 칭호는 아무리 생각해도 무례한 일이다. 중국이나 조선의 유명한 `남성` 문장가들도 혀를 내둘렀던 그녀의 시를 어찌 여류라는 말로 가둘 수 있을까. 허균(許筠)에게서 난설헌의 시를 받았던 명(明)나라의 대문장가요, 학자인 주지번(朱之蕃)은 뛰어난 시를 받게 된 것에 여러번 고마움을 표하고 중국으로 돌아가 『난설헌집』을 펴냈다. 난설헌의 동생인 허균이 "학산초담(鶴山樵談)"에서 `누님의 시와 문학은 모두 하늘이 내어서 이룬 것들이다. 시어(詩語)가 맑고도 깨끗해서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고 했다. 그녀의 재능은 시뿐 아니라 서화에까지 미쳤다. 난설헌의 글씨인 `한견고인(閒見古人)`과 그림 `앙간비금도(仰看飛禽圖)`는 빼어난 작품이다. 다음의 시는 난설헌이 스물세 살에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고 쓴 시다. 碧海浸瑤海 靑鸞倚彩鸞 벽해침요해 청란의채란 芙蓉三九朶 紅墮月霜寒 부용삼구타 홍타월상한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몽유광상산시서(夢遊廣桑山詩序)의 전문(全文)이다. 그녀는 과연 시의 내용대로 숨을 거두었다. 스물일곱 살 되던 해의 삼월 열아흐렛 날, 목욕하고 새 옷을 갈아입더니 몸에 아무 병도 없는데 그대로 눈을 감은 것이다. 이 시의 끝부분에는 다음과 같은 허균의 견해가 실려있다. "우리 누님이 기축년(1589) 봄에 돌아가셨으니, 그 때 나이가 27세였다." 그녀의 시에, '스물일곱 꽃송이 떨어지다(三九紅墮)'란 말은 곧, 3·9의 수 3 x 9 = 27을 뜻하는 말이다. 유언에 따라 그녀의 모든 시는 불태워졌다. 그나마 일부가 친정에 남아 있지 않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허난설헌 문학의 풍성하고도 고귀한 단 한 줄의 글도 이렇게 대할 수가 없을 것이다. *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 본명 초희(楚姬). 난설헌은 호. 별호는 경번(景樊). 본관 양천(陽川). 허균(許筠)의 누이로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워 천재적인 시재를 발휘했으나 27세로 요절했다. 남편 김성립(金誠立)과는 금슬이 좋지 못했다. 작품으로 유선시(遊仙詩) 등 142수와 가사작품으로는 규원가, 봉선화가 등이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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