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태조왕건과 나주의 완사천

청정지역 2016. 9. 2. 13:40

    

      

태조 왕건과의 사랑이 싹텄던 나주의 완사천

    ♣ 고려 태조 왕건과 나주(羅州)의 완사천(浣紗泉) ♣ 나주(羅州)에 가면 나주시청뒤에 빨래샘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완사천(浣紗泉)이라 하지요 우리가 옛날부터 한번쯤 들어왔을 이야기인데 샘터를 지나가던 어떤 장군이 목이 말라 샘터에 있던 어느 여인에게 물 한바가지를 부탁 했지요 그 여인은 부탁을 받고 바가지에 버들잎을 함께 띄워 물을 건네 주었어요 장군이 버들잎을 띄운 연유를 묻자 물도 급하게 마시면 체하는법 버들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마시라고 하였지요 장군은 그 여인의 현명함에 반하여 결혼을 하게되었다는 이야기지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과 장화황후(나주 오씨)이야기지요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전쟁에서 당시 금성(나주)을 정벌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나주의 유력 가문이었던 오씨 가문과 맺어지게 되는 이야기라 하네요 그리고 이 완사천(浣紗泉)은 장화황후가 왕건에게 물을 떠주던 샘터이지요 태조 왕건이 장화황후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를 조금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후백제의 민심이 이반된 틈을타 왕건은 서남해안을 공략하였는데 이때 오씨(오다련)등 서남의 귀족들이 후백제 견훤의 폭정에 못이겨 왕건에게 귀부 하였지요 이때 왕건이 갑판 선상에서 멀리 바라보니 이상하게도 오색(五色)의 운기가 서려있는곳이 있어 말을타고 달려가보니 그곳에는 빨래를 하고 있는 어여뿐 소저가 있었지요 그래서 왕건은 그 소저에게 물은 달라 했다는 전설이 있지요 장화황후는 원래 신분이 낮은 나주 호족의 딸이었으나 태조 왕건을 만나 고려2대왕 혜종을 낳고, 대광(大匡)인 박술희(朴述熙) 등의 비호를 받았지요 언제 죽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지금까지도 나주 지역에 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고 있어요 여기서 고려역사를 되집어 보면 태조 왕건이 군사를 이끌고 행군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다가 나주 금성산(錦城山) 남쪽에 상서로운 오색 구름이 서려 있는 것을 보고 말을 타고 그 곳으로 달려갔어요 열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예쁜 처녀가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을 보고 물을 청하자 처녀는 바가지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 건네주었지요 태조가 이상히 여겨 버드나무 잎을 띄운 까닭을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장군께서 급히 물을 마시다가 혹 체할까 염려되어 그리하였나이다" 하고는 얼굴을 붉히면서 고개를 떨구었어요 이에 감동한 태조 왕건이 그의 아버지를 찾아가 청혼을 하고 흔쾌히 승낙을 받았는데 처녀는 왕건이 찾아 오기 며칠전에 이미 황룡 한 마리가 구름을 타고 날아와 자신의 몸 속으로 들어 오는 꿈을 꾸었다고 하지요 실제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면 당시 나주 지역의 유력한 호족이었던 장화황후의 부친 오다련과 왕건 세력과의 결속의 증표로 볼수 있겠지만 이런식의 이야기와 그 유적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것을 보면 대단한 설화가 아닐수 없어요 사실 지금의 나주(羅州)는 후백제의 땅이 었는데 왕건이 배를타고 후백제의 후미를 정벌하여 고려의 땅이 되었는데 그때는 나주(羅州)를 금성(錦城)이라 불렀지요 이곳 나주(羅州)의 지명은 옛날 삼국시대 백제땅 일때는 발라ㆍ통의라 불렀으며 통일신라 시대때에는 발라주(發羅州)라 불렸지요 그러나 견훤이 후백제를 세우면서 금성(錦城)이라 불리웠는데 왕건이 이곳 금성(錦城)을 정벌하자 고려 창시자 궁예가 이를 기념하기위해 후백제의 금성(錦城)을 나주(羅州)라 부르게 했으며 나주 정벌에 공이큰 지방호족 오다련을 나주오씨로 하라는 황명을 내려 나주오씨의 시조가 되었어요 그후 궁예는 관심법으로 실정을 하여 왕건에게 고려를 빼앗겼으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여 명실공히 고려의 태조가 되었지요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29명의 아내를 두었지요 왕건이 장군이었을때 처음 맞이했던 부인은 신혜왕후 유(柳)씨 이지요 왕건의 첫 부인이 된 신혜왕후 유씨는 경기도 정주(승천) 태생으로 삼중대광 유천궁의 딸이었어요 유천궁은 경기 북부지역인 정주의 호족이었는데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정주땅을 지나던 중 그 지역의 유력자인 유천궁의 집에 초대받게 되었지요 초대받은 왕건은 유천궁의 집에 들려 융성한 접대를 받으면서 며칠동안 그곳에 머물게 되었어요 그때 유천궁은 자신이 초대했던 왕건의 풍모에 반하여 자기 딸을 불러 왕건을 접대하도록 한 후 밤이 깊어지자 왕건의 침실로 들여보내 동침하도록 하였지요 왕건이 떠난 후 신혜왕후 유씨는 왕건을 오래동안 기다렸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으므로 실망하여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어요 왕건은 뒤늦게야 자신과 동침했던 유씨가 자신을 기다리다 소식이 없자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 수소문하여 그녀를 찾아 데리고 와서 첫부인으로 삼았지요 왕건의 첫부인이 된 유씨는 병약했지만 과단성있는 여자였어요 그래서 후일 왕건이 궁예를 몰아낼때 망설이는 왕건을 갑옷을 내어주며 부추키어 거사를 행하도록 함으로써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지요 궁예의 폭정에 반발한 장군들이 왕건을 받들기로 결의하고 왕건의 사저로 찾아왔을때 왕건은 그들 장군들의 청을 거절하였어요 그때 함께 있던 부인 유씨가 나서서 왕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갑옷을 꺼내주며 앞장서서 나설 것을 권한 것이지요 "지금 여러 장수들의 의견을 들어보니 아녀자인 저로서도 억누를수 없는 분노가 치미는데 하물며 대장부로서 가만히 있어야만 되겠습니까? 지금 백성들의 마음이 이처럼 원통하고 분하오니 이는 하느님의 뜻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부인 유씨의 말을 듣고난 왕건은 부인 유씨가 꺼내준 갑옷을 받아입고 장군들의 청을 받아들여 반란에 앞장서게된 것이지요 이로써 왕건은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어 새로운 왕국을 세울수가 있었어요 그러나 왕건의 첫부인이 된 유씨는 한명의 자녀도 낳지못한 채 젊은 나이로 죽었고 나중에 왕건의 묘인 현릉에 합장되었지요 그리고 왕건의 두번째 부인 장화왕후 오씨는 나주 목포 사람으로 아버지는 오다련 이지요 왕건이 후백제 남쪽 지역인 금성(나주)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을때 그곳에서 만나 결혼을 하였어요 여기서 그 유명한 나주의 완사천(浣紗泉)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는데 그녀는 왕건과의 사이에서 장남인 무(혜종)을 낳았지요 그러나 왕건이 고려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그녀의 집안 가문이 미천하다 하여 궁중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였지요 특히 왕건이 왕위에 오른후 얻은 세번째 이후 부인들과 갈등을 겪게 되면서 더욱 힘을 잃어가게 되었지요 왕건의 세번째 부인은 신명순성왕후 유씨이지요 그녀는 충주 출신으로 내사령 유긍달의 딸이었는데 태자 태와 정종, 광종 등 여섯 아들과 두 공주를 낳았지요 신명순성왕후 유씨는 왕건이 왕이 된후 처음 맞이한 왕비였는데 왕건은 충주의 호족이며 그 당시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유긍달과 결연을 맺기위해 그의 딸을 맞이한 것이지요 왕비 중에서 가장 많은 자식을 낳은 유씨는 두명의 아들이 왕위에 올랐고 딸 하나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과 혼인하였지요 왕건의 4번째 부인은 신정왕후 황보씨이지요 그녀는 황주 사람으로 삼중대광 황보제공의 딸이었는데 성종의 아버지가 되는 대종 왕욱과 광종의 비가 되는 대목 왕후를 낳았지요 왕건의 5번째 부인은 신라 경순왕의 큰아버지인 김억렴의 딸로 신성왕후 김씨이지요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할 뜻을 나타내자 왕건은 사신을 보내어 신라 종실과의 혼인을 청하였어요 이에 경순왕이 자신의 사촌누이 김씨를 왕건에게 시집을 보냈지요 신성왕후 김씨는 왕건과의 사이에서 안종을 낳았어요 왕건의 6번째 부인은 경기도 정주(승천) 출신으로 시중인 유덕영의 딸인 정덕왕후 유씨이지요 그녀는 왕건과의 사이에 왕위군, 인애군, 원장태자, 조이군 등 네 왕자와 문혜왕후, 선의왕후 등 세 공주를 낳았어요 왕건의 7번째 부인은 헌목대비 평씨로 왕건과의 사이에 수명태자를 두었으며 왕건의 8번째 부인은 정목부인 왕씨로 1녀를 두었지요 왕건의 9번째 부인은 동양원부인 유씨로 2남을 두었고 왕건의 10번째 부인은 숙목부인으로 원녕태자를 낳았어요 왕건의 11번째 부인은 천안부원부인 임씨로 효성태자 임주와 효지태자 등 2남을 낳았지요 왕건의 12번째 부인은 홍복원부인 홍씨로 왕건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었으며 왕건의 13번째 부인인 후대량원부인 이씨와 14번째 부인인 대명주원부인 왕씨 15번째 부인인 광주원부인 왕씨는 왕건과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어요 왕건의 16번째 부인인 소광주원부인 왕씨는 왕건과의 사이에 1명의 왕자를 낳았고 왕건은 17번째 부인인 동산원부인 박씨와 18번째 부인인 예화부인 왕씨, 19번째 부인인 대서원부인 김씨 20번째 부인인 소서원부인 김씨, 21번째 부인인 서전원 부인, 22번째 부인인 신주원부인 강씨 23번째 부인인 월회원부인, 24번째 부인인 소황주원부인과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한명도 없었지요 왕건의 25번째 부인인 성무부인 박씨는 4남1녀를 두었고, 26번째 부인인 의성부부인 홍씨는 1남을 두었으며 왕건의 27번째 부인인 월경원부인과 28번째 부인인 몽량원부인 박씨 그리고 29번째 부인인 해량원부인과의 사이에서는 자녀가 없었어요 왕건의 이러한 결혼정책은 호족들의 연합체 성격이 짙었던 당시 고려 초기의 상황에서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이면서 중앙집권적인 지배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지요 당시 고려는 통일국가의 모습을 갖추고는 있었지만 각 지방마다 사병들을 거느린 호족들이 독자적인 세력을 강력하게 형성하고 있었어요 따라서 왕건의 결혼정책은 이들 호족들과 인척으로 연결되어 정국을 안정시키면서 하나의 통일국가를 형성해가는 과도기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지요 그러나 왕건의 이러한 결혼정책은 왕건이 살아있었을 때는 나라의 안전판 역할을 하였지만 왕건이 죽은 후에는 그와 그의 수많은 부인들 사이에서 태어난 25명이나 되는 왕자들 때문에 격렬한 왕권다툼의 빌미가 되었지요 그래서 옛말에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나봐요 ㅎㅎ -*녹림거사(일송) *-


    ▲ 나주 시청은 언덕진 곳에 위치해 있고 그 뒤쪽 아래에 완사천이 있지요



    ▲ 이 완사천에는 장화황후로 추정되는 인물의 동상이 만들어져 있어요



    ▲ 완사천 주변으로는 벗꽃과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있어요




    ▲ 왕건과 나주오씨와의 사랑이야기가 전설로 남이있는 완사천 모습이지요



    ▲ 태조왕건에게 장화황후가 물을 건내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동상



    ▲ 아름다운 모습이지요



    ▲ 나주시에서는 이곳을 공원으로 잘 꾸며 놓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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