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총 금관에 손을 뻗는 순간… 하늘이 울기 시작했다
지난달 27일 경북 경주시 천마총 앞에 선 지건길 국외소재문화재재단 이사장(73·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정말 하늘이 노(怒)한 것인가…’
1973년 7월 초순 천마총 발굴 현장.
저녁 어스름이 깔릴 무렵 바쁘게 움직이던 조사원들이 일손을 잠시 멈추고 숨을 죽였다.
목관 머리부분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노란색 금속이 모습을 드러냈다.
광복 이후 우리 손으로 처음 건져낸 신라 금관이었다.
금관총이나 서봉총 금관은 일제강점기 일본 고고학자들이 찾아냈다.
관테부터 영락까지 흙에 묻힌 금관 전체를 대칼과 붓으로 노출시키는 데 5시간이 걸렸다.
지건길(당시 문화재관리국 학예연구사)은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신라 금관 발굴이었다.
황홀경 그 자체였다”고 회고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금관을 나무상자 안에 옮겨놓자마자 뇌우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뚝 그쳤다.
○ 발굴 초창기 열악한 환경
천마총 발굴은 최대 규모의 적석목곽분인 황남대총 발굴에 앞서 기획된 일종의 테스트베드였다.
박정희 정부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에 따라 황남대총 발굴이 결정되자
당시 문화재위원회와 김정기 발굴단장은 “황남대총의 규모와 중요성에 비해 발굴 경험이 일천하니
이보다 작은 천마총을 먼저 발굴하자”고 제안했다.
이로써 1970년대 국책 발굴사업의 본격적인 서막이 열렸다.
초창기였던 만큼 작업 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지름 60m, 높이 13m에 이르는 거대 봉분의 흙을 퍼내는 것부터 고역이었다.
굴착기나 컨베이어벨트와 같은 기계를 동원할 수가 없어
드럼통을 반으로 쪼갠 뒤 이를 이어 붙인 관로(管路)를 직접 만들었다.
봉분 꼭대기에서 삽으로 퍼낸 흙을 관로로 흘려보내는 식이었다.
지건길은 “그때의 원시적인 작업 광경을 요즘 고고학자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 1500년을 품은 천마도의 신비한 색(色)
무덤 이름이 천마총이 된 것은 목제 부장궤 안에서 ‘천마도(天馬圖)’가 그려진
말다래(말을 탈 때 흙이 다리에 튀지 않도록 안장 밑에 늘어뜨리는 판)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지건길이 천마총에서 출토된 유물 중 최고로 꼽는 천마도는 처음 발견된 신라시대 채색화다.
그는 “외부 공기에 닿아 변색이 일어나기 직전의 천마도는
너무도 생생한 빛깔을 담고 있어서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천마도는 보존 처리까지 만만치 않은 과정을 거쳤다.
유물 수습과 동시에 아직 부식되지 않은 부장궤 일부 나무판재를 약품 처리했다.
김유선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의 조언에 따라 폴리에틸렌글리콜(PEG)을 가열해 녹인 뒤
붓에 묻혀 판재에 꼼꼼하게 발랐다.
하루 만에 발굴을 끝낸 무령왕릉과 달리 8개월에 걸쳐 진행된 천마총 발굴이지만 후회는 남았다.
'명인 · 고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0) | 2016.10.15 |
---|---|
이런 왕릉 보셨나요? (0) | 2016.10.14 |
와신상담 과 절치부심 (0) | 2016.10.12 |
아사달 아사녀는? (0) | 2016.10.11 |
나도밤나무 너도밤나무 (0) | 2016.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