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혼례는 일륜지 대사

청정지역 2016. 11. 25. 18:34

▲ 새신부의 얼굴에 연지 곤지와 족두리를 썼어요 ...
 


    ◈ 연지곤지 그리고 족두리 ◈ 옛부터 혼례는 일륜지 대사중 으뜸이라 했지요 그래서 혼례때는 집안 모두가 나서서 성(誠)과 예(禮)를 다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 혼례식에 신랑은 머리에 사모관대를 하였으며 신부는 얼굴과 머리에 "연지"와 "곤지" 그리고 "족두리"를 썼었지요 신랑이 쓰고 입는 사모(紗帽)와 관대(冠帶)는 조선시대 문무백관이 평상시 집무할때 입는 옷이지요 사모를 쓰고 단령포를 입었으며 네모진 흉배(胸背)를 가슴과 등에 붙였어요 허리띠는 조복의 대(帶)와 같고 흰색 버선에 협금화(挾金靴)를 신었지요 지금은 결혼식 폐백을 드릴때나 전통혼례를 할때 신랑이 입는 옷이지요 그런데 신부의 얼굴에는 반드시 연지곤지를 찍었고 머리에는 족두리를 썼어요 그럼 왜 새신부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고 머리에는 족두리를 썼을까요? 연지는 양볼에 곤지는 이마에 붉은색으로 동그랗게 그리지요 음양오행사상의 오행에는 오색이 따르는데 오방정색이라고 하는 황, 청, 백, 적, 흑의 5가지 색중에서 적(赤)은 오행 가운데 화(火)에 해당하며 생성과 창조, 정열과 애정, 적극성을 뜻하여 가장 강한 벽사(귀신을 물리침)의 빛깔로 쓰였지요 이렇게 붉은 색은 귀신을 쫓아내고 부정을 막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옛부터 우리 조상들은 나쁜 기운을 막고 무병장수를 기원해 돐이나 명절에 어린아이에게 붉은색이 들어있는 색동저고리를 입히고 간장 항아리에 붉은 고추를 넣거나 끼워 금줄도 두르고 붉은 빛이 나는 황토로 집을 짓거나 신년에 붉은 부적을 그려 붙였지요 그래서 혼례를 올릴때에도 나쁜 악귀를 몰아내기 위해 신부의 이마와 양 볼에 붉은 연지곤지를 바르게 했다는 설이 있어요 그러나 혼례날이라고 해서 모든 신부가 연지곤지를 찍는것은 아니었지요 연지곤지는 신부의 처녀된 몸과 마음을 상징하는 것이어서 초혼에만 허락되는 관례였어요 따라서 연지곤지를 찍는것은 악귀를 물리침과 동시에 처녀임을 나타내는 두가지 뜻이 담겨있다 하지요 그런데 연지(臙脂)는 원래 볼과 입술에 붉게 칠하는 전래의 화장품이었지요 연지를 볼이 아닌 이마에 동그랗게 찍어바르면 그것이 곤지가 되지요 연지곤지에 대한 유래에는 여러 가지 설(說)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것은 연지곤지가 원래 생리중이란 표시였다는 설이있어요 여염집 아녀자들이 그런 표시를 할 필요는 없지만 임금의 여자인 궁녀들은 ‘오늘은 임금님을 모시지 못합니다’ 라는 표시로 뺨에 연지를 발랐다는 것이지요 연지는 홍람화(紅藍花)라는 화초에서 채취한 붉은 물감이며 연지는 뺨에 찍는 것을 말하며 곤지는 이마에 둥글게 찍는 것을 의미하지요 그런데 이 물감은 잇꽃(홍람화:紅藍花)이라는 화초의 꽃잎에서 채취하는데 이 화초에는 카타르몬(Carthamin)이라는 물에 잘 녹지 않는 빨간색 색소와 사프란 옐로우(Saffron yellow)라는 물에 잘 녹는 노란색 색소가 함께 들어 있다 하네요 그래서 잇꽃을 오래 물에 담가 노란색 색소를 빠지게하고 빨간색 색소만을 뽑아 낸것을 연지(燕脂)라고 하지요 연지는 옛날 중국 은나라 주왕의 왕비로 요염하고 음탕하기로 이름났던 달기가 처음 만들었다고 하며 연(燕)나라에서 그 원료를 가져 왔다 하여 '연지'라는 이름이 생겨났다 하네요 한때는 한나라 궁녀들이 월경이 있을때 얼굴에 발라 월경중임을 연지로 표시하기도 했는데 차차 화장품으로 발달하여 볼, 입술, 손톱 등 얼굴전체에 바르게 되었으며 우리도 이때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결혼식때 새색시 얼굴에 연지곤지를 찍는 풍습이 생겨났다 하네요 이는 신부의 얼굴을 더 곱게 보이게도 하였지만 붉은색이 악마를 막아 준다는 주술적인 뜻도 함께 있었지요 아마 연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먼저 사용한 화장품의 하나 라고해도 과언이 아니라 하는군요 연지는 오래가도 색이 변하지 않고 독이 없으며 향기가 오래 지속되는 특성이 있어 지금도 입술에 바르는 루즈 원료나 과자, 떡, 청량음료를 착색하는데 널리 쓰이고 있어요 또한 그림을 그리는(서화용) 물감으로도 많이 사용하였고 그릇을 채색하는 데도 많이 사용하였으며 특히 은물에 연지를 덧칠하면 금빛이 나오므로 금색깔을 내는 금박대용으로 요긴하게 쓰였다 하네요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가 한때 몽골의 사위 나라가 된 적이 있었지요 몽골은 우리민족의 정기를 끊기 위해 우리나라의 왕을 의무적으로 원나라 왕녀와 혼인을 시켰는데 충렬왕때부터 공민왕때까지 7명의 원나라 왕녀가 고려 왕에게 시집을 왔어요 그들이 시집올때 수많은 몽골사람들을 하인으로 데려와 그들의 언어와 풍습이 고려의 궁중과 상류사회에 적잖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지요 족두리는 원나라에서 왕이 왕비에게 내린 족두리(고고리)인데 이것이 널리퍼져 몽골에서 족두리는 결혼한 여자가 나들이할때 쓰는 모자였지요 고려시대때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로 모양이 점차 작아지며 머리 장식품으로 변하였으며 영조 임금때 가발이 비싸 왕비나 세자빈이 족두리를 쓰면서부터 많은 사람들이 쓰게 되었는데 궁중이나 양반집에서 혼례복에 족두리를 쓰면서부터 서서히 평민들도 사용하게 되었다 하네요 그러나 족두리를 너무 금,은,옥 장식으로 예쁘게 꾸미자면 많은 돈이 들어가므로 영조임금은 사치를 막기 위하여 족두리는 모두 흑색으로 하고 장식을 많이 하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래서 조선조 중후기 가체(加痂)금지령이후 궁중이나 반가에서는 소례복이나 원삼에 족두리를 쓰고 평민은 혼례때만 원삼에 족두리를 사용하게 되었어요 여기서 원삼(圓衫)이란 앞깃이 둥근 데에서 온 명칭으로 조선시대 부인의 예복이지요 족두리는 일명 족아(簇兒) 족관(簇冠)이라고도 하였는데 검은 비단으로 만들어 아래는 둥글고 위는 여섯 모로 되었으며 솜이 들어있고 그 가운데를 비게하여 머리에 쓰게한 것으로 장식이 없는 민족두리, 산호주(珊瑚珠), 밀화구슬, 진주를 꿰어 만든 '꾸민족두리'가 있지요 아무튼 연지곤지와 족두리는 고려시대때 부터 우리나라를 사실상 지배했던 원나라의 풍습 즉 몽고인들의 풍습이 전해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물론 곤지는 모르더라도 볼에 찍는 연지는 고구려 벽화에서도 나타나고 신라시대때도 나타나는 걸로 봐서 반드시 고려때 몽고인의 풍습이 전해진 것은 아니라는 설도 있어요 하지만 고려시대때 부터 몽고인들은 시집갈때 반드시 연지 곤지를 찍었던 건 사실이며 당시 지배계층에선 몽고인들의 풍습을 좋게 여겨 많이 따랐던것 또한 사실이지요 오늘날 신랑신부들이 서양의 결혼복인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는 것과 마찬가지 이지요 해서 전통혼례때 족두리를 쓰는것은 분명 몽고인들의 풍습이며 그리고 신랑쪽과 신부쪽 부모끼리 서로 "사돈"이라고 하는데 사돈이란 말도 사실은 몽고어에서 유래된 말이라 하네요 유래가 어찌되었던 시집가는 신부가 연지 곤지를 찍었던 것은 얼굴을 예쁘게 보이려는 화장술의 일부인 동시에 악귀의 장난으로부터 신부를 보호한다는 주술적 의미가 크게 작용한것은 사실이지요 옛날부터 결혼식때 신부에게 악귀가 달라 붙지 못하도록 조치하는 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많은 나라들이 신부를 보호하기위해 많은 방법들을 사용하였어요 옛날부터 신부 '들러리'라고 하여 신부 친구들이 신부 주위에 둘러서게 하였는데 이는 바로 악귀가 어느사람이 신부인지 알아 채지 못하도록 연막작전을 편 것이라 하네요 그리고 서양풍습으로 오늘날 결혼식때 신부가 손에드는 '부케'도 유럽 전역에 전염병이 유행할때 신부가 나쁜 병(전염병)에 걸리지 않도록 예방차원에서 약초다발을 손에들고 결혼식을 올린것이 부케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요 나중에 전염병이 물러가고 난 뒤에는 약초다발을 안들어도 되었지만 어쩐지 오랫동안 해왔던 풍습을 버릴수가 없어 약초다발 대신에 들꽃을 한다발 들려 준게 오늘날과 같은 부케(꽃다발)의 시작이 되었다고 하네요 부케의 의미는 "다산을 바라는 마음"이라 하는군요 아무튼 신혼이란 한쪽은 신나고 한쪽은 혼난다는 유모어가 있는데 과연 어느쪽이 신이나고 어느쪽이 혼이 날까요? 곰곰 생각해 보시기 바래요 ㅎㅎ -* (일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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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 연지를 만드는 홍화는 홍람(紅藍)·홍화(紅花)·이꽃·잇나물이라고도 하지요 ...


    ▲ 청사초롱 ...


    ▲ 잔치 한마당 ...


    ▲ 원삼 족두리 새신부와 함께 ...


    ▲ 사모관대 새신랑이 입장하기전인데 허허 이건 아니지요 사모관대가 아니라 왕이입었던 곤룡포를 입었네요 ...


    ▲ 대례청(초례청) 준비 끝 ...


    ▲ 드디어 혼례는 시작 되었고 ...


    ▲ 사물놀이패가 먼저 분위기를 띄우네요 ...




    ▲ 새신랑이 먼저 입장을 하고 ...




    ▲ 그리고 새신부 입장 ...


    ▲ 드디어 대례를 치루고 ...



    ▲ 기념사진을 찍으면 끝이 나지요 ...



    ▲ 그런데 새신부가 V자를 만들고 있어요 결혼에 승리하였다는 의미일까요? 아니면 오늘부터 잘못하면 자른다는 의미 일까요? ㅎ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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