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눈이 나쁘면 왜 해태눈이라고 할까

청정지역 2016. 12. 1. 09:45


 

경복궁의 정문 광화문 양옆에 해태 조각이 하나씩 세워져 있습니다. 해태는 화기를 억누르는 영물이라 화재를 예방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또한 사악한 탐관오리를 용서하지 않는 법과 정의의 수호신으로서 세워놓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해태상을 세워놓는다고 해서 탐관오리가 근절되는 건 아니잖아요. 세상에는 멀쩡히 탐관오리가 들끓고 있죠. 그래서 해태가 탐관오리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한다는 의미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안다는 상상의 동물이다. 사자와 비슷하나 머리 가운데에 뿔이 있다고 한다. 중국 문헌인 《이물지(異物志)》에는 "동북 변방에 있는 짐승이며 성품이 충직하여 사람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사람을 뿔로 받는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한국에서는 대사헌의 흉배에 가식(加飾)되기도 하였고, 화재나 재앙을 물리치는 신수(神獸)로 여겨 궁궐 등에 장식되기도 하였다. 해태"는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상상 속의 동물이니만큼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출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 중국 한나라 때 양부(楊孚)가 지은 《이물지 (異物志)》라고 하는 책이다. 이에 따르면 "동북 지방의 황량한 땅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이름을 '해치'라 한다.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하다.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 못한 자를 문다"고 되어 있다. 그 이후 여기에 옛날 우 임금때 법을 맡았던 신하인 고요(皐陶)가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 이 해치를 써서 죄가 있는 사람을 받게 하였다든가, 상서로운 짐승이어서 옥송이 잘 해결되면 나타난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그 이름도 본래는 "해치"가 가장 원명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첫 글자는 대개 "해"로 읽으며, 해 외에 解, 해 등을 쓰기도 하고, 둘째 글자는 치 외에 치 등을 쓰기도 하는데 자전에 "발 없는 벌레 치, 해태 채"로 나오므로 "해치" 또는 "해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중국음으로는 듣기에 따라서는 "태"가 될 수도 있으므로 우리나라에 와서는 "해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물은 그 밖에 그 시비곡직을 분별하는 속성을 따서 법을 맡은 관원들의 상징이 되었으므로 임법수(任法獸)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그 관원들의 모자에 이 동물의 뿔을 문양으로 새겨 넣어 그 관을 해치관(해치冠)이라 하기도 하였다. 해치│특집 손 성 동국대 법과대학교수 글, 인터뷰│ 김명숙 본지 편집팀장 사진│ 김창희 사진작가 Q. 해태를 해치라고 하는 의견이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해태와 해치를 뚜렷이 구분을 하고 계십니다. 구분하게 된 근거와 이유는? A. 해치와 해태를 구분하기 이전에 해치와 해태라는 동물은 관복의 흉배, 조각상 등에 나타난다. 해태 해치라는 명칭이외에도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운다. 명칭은 다양하다는 이야기이며 명칭상의 구분은 상당히 어렵다. 결국 모양 상으로 구분하는 것이 보다 간단하다고 해야 할터인데 큰 차이점은 뿔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다. 경복궁 광화문에 있는 것은 뿔이 없으며, 法字박물관(法門館)에 소장되어 있는 흉배에도 뿔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이것 즉 뿔의 존재여부로 구분하는게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연구에 의하면 뿔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해치와 해태는 똑같이 법 글자에 관련이 있는데, 각각 법자에 쓰여 있는 해치 치(한문)자 해태 태(한문)자와 관련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아마도 종족적인 연유에서 그렇게 된 것으로 풀이된다. 결론으로 뿔이 있는 것을 해치라고 이름을 짓고 북방계라고 하고 뿔이 없는 것을 해태라고 하고 남방계라 한다. 해치와 해태의 구분은 긴 학문 연구 끝에 최근에 와서 뿔로 구분했다. 경복궁 광화문 앞에 있는 해태는 뿔이 없다. 그래서 해태이고 남방계 해태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뿔이 있는 중국의 중경에 있는 서남정법대학에 있는 것은 상이나 각종 뿔이 있는 것들은 해치이고 북방계 해치라 할 수 있다. Q. 法자에 대한 연구를 심층적으로 하시면서 천문, 주역, 지리, 풍속, 신화학을 관통하는 고증자료를 근거로 해태와 해치 상을 구분하셨는데 ? A. 천문지도에서 보면 북방현무의 우두머리 별인 南斗六星(남두육성)이 상징하는 것은 해치이며, 남방주작의 우두머리 별인 東井八宿(동정팔수)가 상징하는 것은 해태이다. 각종의 천문관련자료를 근거로 했을 때 그렇다. 법자가 문자상에 등장한 것은 주나라 4대왕인 강왕으로 기원전 1000년경이다. 이때의 법자를 보면 실제로 소였다. 당시 주나라시절 하늘에 지내는 가장 규모가 큰 재사를 大社라고 했는데 소가 희생이었다. 예기에 의하면 소를 9등분하여 천제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그런데 이 소가 후대로 내려오면서 해치, 해태로 변한다. 소를 재물로 했던 것인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 상형자가 진나라 때에 소전에서 치 혹은 태로 읽히는 치(?)자로 바꾸게 되었다. 상형자에서 소전에 이르는 동안의 법자의 변천과정을 보면 소가 서서히 상상의 동물인 해태, 혹은 해치로 바뀌는 과정이 흥미롭게 나타난다. 1,500년간의 긴세월 속에서 진행된 것으로 그것만으로 참으로 호기심을 유발하는 연구대상임을 확인하면 가슴이 벅차다. 권력투쟁에 밀려난 종족, 득세한 종족, 한눈에 들어온다. 그들의 이동상황을 추적하다가 보면 위에서 내린 결론에 도달한다. 북방계는 뿔이 있고, 남방계는 뿔이 없이 나타난다. 북방계가 뿔이 있는 이유는 치우(도깨비)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도 밝힐 수 있다. 남방계는 그 반대로 다른 영향을 받았다. 문자적으로 보면 똑같이 법이라고 읽는데 북방계 법자는 해치치(한문)를 써서 갈거(去)로 쓰고 남방계는 력, 혹은 격으로 읽히는 ?자를 써서 법자를 표현한 흔적이 뚜렷히 보인다. Q. 북방계 남방계를 구분하는 문헌적 근거와 우리나라에 등장하는 해태상이 남방계가 많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일본은? A. 상고로 올라가면 중원문화는 삼진지구를 대상으로 하는데 이 중원의 쟁패를 둘러싸고 권력투쟁이 생겼고 이 과정에서 각 중족이 여러 가지 이유로 각지로 흩어지면서 북방계와 남방계라는 구분이 성립이 된다. 우리나라에는 뿔이 없는 광화문 해태가 있는데 이유는 명나라 영향인 것 같다. 明 이후에는 철저하게 남방계 계통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명나라 한족이 조선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결국 뿔이 없는 해태가 등장한다. 조선초기에는 치우를 적극적으로 모셨는데 후대에 오면서 치우에 소홀해 진 것은 명나라의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다. 일본은 뿔 있는 해치에 대한 조각상이 별로 없다. 일본은 해치가 가상의 동물임을 알고 허신의 해치 해석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이거나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학문적으로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일본에는 그 대신 칸이라는 조각상이 제법 눈에 띈다. 뿔이 없는 것으로 큰 개로 보이는데 나는 이것을 뿔 없는 해태로 해석한다. 일본의 문화는 기실 남방계를 깊숙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뿔이 있고 없고의 구분은 단순하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헌, 천문학 등에 접근해야 비로소 눈치를 챌 수 있다. 왜 해태, 해치가 법자에서 부각이 되었느냐? 매우 학술적이고 진지한 논의를 요하는 연구대상이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주나라가 망하고 춘추전국이후 치자가 법 글자에서 없어지고 후한 때 허신이 지은[설문해자]에 법을 해치치(한문)로 해석한 후 굳어진 것인데 해치가 다시 부각된 것은 부계사회 즉 남성중심 사회를 부각시키는 의미를 가진다. 부계사회에서 해치를 부각시켜 여성성을 제어했다고 보여 진다. 여기서 法자는 여성성을 띈다는 가설을 들어 설명될 수 있다. 법자박물관을 개관하면서 위에서 설명한 내용들을 한 곳에 모았다. 그동안의 연구업적으로는 「외뿔양 해치의 르네상스>나 “고고자료에서의 법률의 기원”들의 책과 논문 등이 있다 Q. 대검찰청 해치 상을 만들 때 나름대로 연구결과를 적용하셨는데 가장 큰 특징이라면? A. 광화문에 있는 해태와 1960년 미국 로스쿨에 있는 작품을 참조하였으며, 한국의 상징 동물인 소를 기본으로 하였다. Q. 경복궁 해태상은 조선시대 이세욱, 검찰청에는 조승환 선생님이 만드셨는데 이밖에 해태, 해치상을 연구하거나 만드는 사람을 아시는지, 고 문헌에 해태와 해치에 관한 내용이 나오는 것이 있다면? A. 만드는 분들과의 접촉이 없고, 연구는 주로 문헌적으로만 한다. 일반문헌이 아닌 천문, 지리, 역사, 풍속 등을 망라해서 공부한다. 특히 천문에 접근하지 못하면 해치와 해태를 풀어낼 수 없다. 예기, 서경, 천문, 갑골, 금문 암각화 등은 물론 풍속 역사 등을 다 공부하지 않으면 해태, 해치를 연구하는데 한계가 있다. Q. 중국의 해태, 해치의 대표작품과 한국의 해태, 해치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이라면? A. 중국은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남방계 해태와 북방계 해치가 폭넓게 존재한다. 한국의 해태, 해치 대표작품은 이론적으로 논리적으로 보면 한국을 상징하는 소를 모델로 가상의 동물인 해치의 외형을 씌운 검찰청에 있는 해치상이 한국형이라고 본다. 사법연수원에 있는 것은 조합형이라고 볼 수 있다. Q.검찰청에 ‘법의 날’ 해치상을 증정하게 된 계기는? A.처음에는 연구실에 작게 놓기 위해 만들었는데 그때 당시 검찰국장을 지내신 이종일박사께서 연구실에서 보고, 연구실에 있을 것이 아니라고 하여 순수한 마음으로 기증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한국형 해치 상을 최초로 만든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Q.법과 관련하여 해태, 해치상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과천시 서울시 군과 군 시와 시 경계 등에 해태가 있는 이유를 아시나요? A. 관심이 없는 문제인데 굳이 설명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지 않나 생각한다. 원래 소였는데 해치라는 상상의 동물로 둔갑한 것이다. 경계선상에 배치한 것은 경복궁 수로에 놓은 것은 뭔가 사기를 쫓기 위함이듯이 경계선상에서 넘어오는 타 지역 사람의 사기를 쫒는다는 의미가 담겨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해태"의 슬픔 광화문 좌우에는 돌로 만든 동물이 한 쌍 앉아 있다. 흔히들 이 동물을 "해태"라고 부르며, 광화문 앞에 그것을 만들어 앉힌 까닭에 대해서는 서울 남쪽에 있는 관악산이 불꽃 모양을 한 화산(火山)이기 때문에 그 기운으로 서울과 궁궐에 불이 자주 나므로 이를 막기 위해서 불을 먹는 동물인 해태를 만들어 앉힌 것이라고 한다. 풍수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이러한 설명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곰곰 따져 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구석이 너무 많다. "해태"는 중국 고대 전설에 나오는 상상 속의 동물이다. 상상 속의 동물이니만큼 그에 관련된 이야기는 출전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이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책으로서 가장 오래된 것이 중국 한나라 때 양부(楊孚)가 지은 《이물지 (異物志)》라고 하는 책이다. 이에 따르면 "동북지방의 황량한 땅에 어떤 짐승이 사는데 이름을 '해치'라 한다. 뿔이 하나이고 성품이 충직하다. 사람들이 싸우는 것을 보면 바르지 못한 자를 들이받고 사람들이 서로 따지는 것을 들으면 옳지못한 자를 문다"고 되어 있다. 그 이후 여기에 옛날 우 임금때 법을 맡았던 신하인 고요(皐陶)가 옥사(獄事)를 다스릴 때 이 해치를 써서 죄가 있는 사람을 받게 하였다든가, 상서로운 짐승이어서 옥송이 잘 해결되면 나타난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덧붙여졌다. 그 이름도 본래는 "해치"가 가장 원명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첫 글자는 대개 "해"로 읽으며, 해 외에 解, 해 등을 쓰기도 하고, 둘째 글자는 치 외에 치 등을 쓰기도 하는데 자전에 "발 없는벌레 치, 해태 채"로 나오므로 "해치" 또는 "해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중국음으로는 듣기에 따라서는 "태"가 될 수도 있으므로 우리나라에 와서는 "해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동물은 그 밖에 그 시비곡직을 분별하는 속성을 따서 법을 맡은 관원들의 상징이 되었으므로 임법수(任法獸)로 불리기도 하였으며, 그 관원들의 모자에 이 동물의 뿔을 문양으로 새겨 넣어 그 관을 해치관(해치冠) 이라 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해치는 사헌부(司憲府)와 관련이 깊다. 사헌부는 시정(時政)의 잘잘못을 따지고 관원들의 비리를 조사하여 탄핵하는 대표적 법사(法司)이다. 그 사헌부의 관원들이 채관(채冠),곧 해채가 장식된 모자를 썼으며, 사헌부의 장인 대사헌은 공복의 가슴과 등에 붙이는 문양― 흉배(胸背)가 동급의 다른 관원들은 구름속에 학을 수놓은 데 비해 유독 해치를 수놓았다. 이렇게 사헌부와 해치가 관련이 깊은 까닭에 사헌부 대문 앞에 해치를 돌로 조각하여 세웠던 것이다. 사헌부는 광화문 앞 육조거리의 서편에 예조, 중추부 다음에 있었다. 오늘날의 세종로 교통방송앞 쯤이 될 것이다. 육조거리를 통해 광화문을 들어서려는 관원들은 사헌부 대문 앞에 앉아 있는 해치 앞을 지나면서 바른 행동, 옳은 말을 하도록 요구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해치가 상징하는 핵심이다. 그런데 1890 년대 옛 사진을 보면 해치 앞에 'ㄴ'자 모양으로 된 두 단짜리 돌 계단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노둣돌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말에서 내릴 때 딛는 디딤돌이다. 다시 말하자면 해치의 구체적인 상징 기능은 여기서부터는 궁궐의 영역이니 모두 말을 내리라는 하마(下馬) 표지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해치는 조선왕조 궁궐의 정문―광화문 몇 십 미터 앞에서 그 나름대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는 상징물이었다. 그렇던 해치가 지금은 여러모로 불구가 되어 버린 광화문 바로 옆에 역시 불구가 되어 앉아 있다. 그 위치가 사헌부 앞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시비곡직을 가리는 구실도 못하게 된 것이고, 바로 그 앞으로 차들이 씽씽 다닌다는 점에서는 하마 표지도 아니게 된 것이다. 더구나 사람들이 그러한 상징은 인정해 주지 않고 관악산의 화기를 막는다는 엉뚱한 미신적 풍수의 의미를 덧씌워 버렸으니 해치 역시 이중 삼중으로 불구가 된 꼴이 아닐 수 없다. 그렇기에 지금 해치의 눈망울이 그리 슬퍼 보이나 보다. 해치를 다시 제자리로 되돌리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최소한 그 본연의 상징과 의미를 알아주기라도 해야겠다. 그러면 해치는 다시 눈을 부릅 뜨고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시비곡직을 가리려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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