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광해군의 생애

청정지역 2017. 4. 16. 21:10

         

 

조선 제 15대 임금 광해군의 생애

 

光海君


생몰년도: 1575년(선조 8)-1641년(인조 19)
활동분야: 왕
다른 이름: 혼(琿)

 

생애와 업적

1623년 3월 12일 새벽. 이귀•김류•이괄 등이

1,0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창덕궁을 기습했다.

반정군의 함성 소리에 놀란 광해군은

창덕궁 담장을 넘어 피신했지만 다음날 붙잡혀 폐위되었다.

 

반정 세력들은 덕수궁에 갇혀 있던

인목대비를 모셔온 뒤 옥새를 넘겨받아 인조를 즉위시켰다.

 반정 세력들이 내건 명분은 첫째,

모후인 인목대비를 가두고 형제인 영창대군을 살해했다는 것,

둘째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백성들을 어려움에 빠지게 했다는 것,

셋 째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 함으후써 명을 배신했다는 것이다.

 

과연 광해군은 왕위에서 쫓겨날 만한 잘못을 했을까.

선조는 아들이 열네 명이나 되었지만

정비인 의인왕후 소생은 없고 모두 후궁에게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자신이 방계(傍系) 혈통이라 마음의 부담이 있었는지

선조는 마흔이 넘을 때까지

세자 책봉을 미루며 적자를 기다렸다.

 

그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분조해야 할 상황에 이르자

급히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했다.

장자인 임해군(臨海君)이 있기는 했지만

성격이 포악하고 임금의 자질이 없다는 이유로 제외되고,

둘째인 광해군이 세자가 되었다.

 

아버지인 선조가 여차하면 명나라로 귀순하려 하던 때

광해군은 전쟁터를 누비며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조정과 백성들의 명망을 얻었다.

 

그러나 명나라는 장자가 있다는 이유로

광해군의 세자책봉을 번번이 거절했다.

 더구나 전쟁이 끝나고 나이 어린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어 적자인 영창대군을 낳자

 광해군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다.

 

신하들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小北派)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大北破)로 나뉘었다.

1608년 선조는 병이 악화되자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준다는 교서(敎書)를 내리고 눈을 감았다.

 

소북파의 유영경이 교서를 받은 뒤

감춰 두고 공포하지 않았지만,

이 일은 대북파인 정인홍•이이첨 등에 의해 발각되고,

인목대비는 세 살짜리 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은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광해군을 즉위시켰다.

 

1608년 광해군의 나이 서른네 살에

왕위에 오르기는 했지만,장자인 임해군과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불안정한 황권이었다.

여기에 명나라가 왕위 계승에 대한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임해군을 만나려 하자

광해군은 임해군에게 사약을 내렸다.

 

그 뒤 칠서의 옥 을 계기로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사약을 받았고,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아직 여덟 살밖에 안된 이복동생을 죽이라는

신하들의 요청을 계속 거부했다고는 하지만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왕권을

위협할 수 있는 대상들(대부분 형제들이다)을

제거하는 것은 태종과 세조의 전례에서 보듯이

비난받을 행위이기는 하지만 폐위까지 거론할 문제는 아니다.

 

단,인목대비를 폐위시킨 것은 조금 다른 문제이다.

대북파의 강경한 주장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일이라 해도,

또 계모이긴 해도,어머니를 유폐시켰다는 부담은

효를 충과 함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유교 사회에서 큰 흠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음으로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졌다는 부분은사실

 당시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완전히 불타버려

왕이 거처할 곳조차 없었고 전란으로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창덕궁•경덕궁•인경궁을 중건하면서 인력을

무리하게 동원하는 일이 생겨 민간의 원성을 사도했지만,

왕이 월산대군의 사저였던 곳을 고쳐서 머물면서

정사를 봐야 했을 정도였던 것을 고려하면

불가피했던 부분이 없지 않다.

 

오히려 광해군은 전란 뒤 민생 안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등극하자마자 선혜청(宣惠廳)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통법을 실시함으로써 세금 부담을 덜어주었고,

양전을 실시하여 경작지를 확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했다.

 

 또한 국가의 기반을 재건하기 위해

전란 중 불탄 여러 출판물들을 다시 찍어내고,

사고를 다시 정비했으며,《동의보감》을 반포했다.

 

광해군의 업적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은 외교정책이다.

조선시대의 왕들 가운데 주변국의 동향과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군주는 아마도 광해군일 것이다.

 

“설사 전쟁이 일어나도 사자(使者)는 그 사이에 있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진 그는 주변국에 대해 끊임없이 정보를 탐색했다.

 

이런 정보수집과 분석을 통해 상대국들의

상태를 파악하고 구체적인 정책을 선택했다

.1618년 명이 후금을 치겠다고 원군을 요청했다

 광해군은 노회한 명이 사나운 후금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 예측했다.

 

그렇게 예측하면서 군대를 보낼 수는 없었다.

광해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해 명의 요구를 피하려 했다.

결국 임진왜란 때 베풀었던

은혜를 갚으라는 명의 압력과 비변사 신료들의 의견을 따라

원군을 보내기는 했지만

강홍립을 원정군의 도원수로 보내면서

상황 판단을 정확히 하고 패하지 않는

싸움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지시했다.

 

강홍립은 후금의 거센 공격에 맞서지 않고

투항하는 길을 택함으로써,명의 요구는 들어주면서

후금에게 조선의 입장을 알렸다.

이후 다시 군대를 보내라는 명의 요구가 있었지만,

광해군은 명에 외교 공세를 펼쳐

더 이상의 징병요구를 차단했다.

 

광해군의 외교 방향은

명에게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지만,

국가의 존폐 여부까지 걸어야 할 요구는 거부한다.

후금은 분명 오랑캐이지만 그들을 다독거려 침략을 막고,

그렇게 번 시간 동안 최악의 경우에 대비한

실력을 배양한다”였다.

 

이러한 외교방법들은 명•후금•왜에 시달리던

당시의 어려운 국제적 현실 속에서

유연하게 대처한 실리주의적 노선으로 매우 탁월한 것이었다.

 

따라서 인조반정은 순수한 구국의

의지에서 비롯된 반정이라기보다는 광해군 때

정치에서 밀려났던 서인들이

정권을 잡기 위해 일으킨 반란라고 보는 편이 옳다.

 

 이후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명과 후금 사의

중립노선 대신 대명사대주의 노선을 걸었고,

그 결과 두 번의 호란을 치러야 했다.

 

폐위된 광해군은 다행히 죽음은 면해,

부인 유씨,아들 며느리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그러나 얼마 뒤 아들과 며느리,

부인을 잃고 혼자 남아 태안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강화,그리고 교동에서

제주도로 옮겨지며 질긴 목숨을 이어갔다.

 

왕위에 앉았던 세월보다

더 긴 시간을 유배지에서 보내다

예순일곱 살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심부름하는 나인의 구박을 받을 정도로

 초라해졌지만 마지막까지

초연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고 전한다.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정권은‘숭병배금’을 내세우다

정묘호란,경자호란을 겪고 삼전도의 굴욕까지 당했다.

 

 


평 가

조선시대를 통틀어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노산군•연산군•광원군의 세 사람이다.

이 가운데 노산군은 단종으로 복위되었고,

연산군과 광해군은 폭군의 전형으로 조선시대 내내 비난 받아왔다.

특히 광해군은 죽은 뒤에도 의도적인 격하가 계속되었다.

 

인조 반정 뒤 광해군을 지지했던 북인들이

거의 전멸해버려‘승리자인 서인들의 손에 의해

기록되고 평가된 광해군에 대한 모든 평가는 가혹할 만큼 신랄하다.

 

“어머니를 쫓아내고 동생을 살해한 패륜아",

“명이 베푼 커다란 은혜를 배신한 배신자로 매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 내내‘어리석고

용렬한 군주’ 라는 뜻을 지닌 혼군(昏君)으로 불렸다.

 

광해군에 대한재평가의 움직임은

20세기에 들어와서야 이루어졌다.

1959년 발표된 역사학자 이병도의 글이 광해군을

탁월한 외교 전문가로 재평가하면서 현재의 역사서들은

대부분 광해군을 “명청교체기의

어려운 상황 속에서 탁월한 실리외교를 통해

국가의 안전과 이익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 임금”으로 인정한다.

 


정인홍

1535(중종 30)~1623(인조 1) 조선 중기의 학자•

의병장•정치가. 남명 조식(曺植)의 수제자로 남명학파를 대표했으며,

북인의 영수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 3,000명을 모아

성주•합천•고령•함안 등지에서 싸웠다.

북인이 소북•대북으로 분열되자 이산해(李山海).

이이첨(李爾瞻)과 대북을 이끌며 광해군을 적극 지지했다.

1618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면서 참형 당했다.

 


칠서의 옥

1613년(광해군 5)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 냥을 빼앗은 강도사건이 발생했다.

 범인 일당은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朴應犀) 등

권력가들의 서자 일곱 명이었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서얼 차별을 없애달라는 상소를 했으나 거부당하자

불만을 품고 1613년 초부터 경기도 여주 남한강변에서

 당을 조직해 전국에 출몰하여 화적질을 일삼다가

문경새재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피살된 상인의 노비가 이들의 뒤를 미행하여

근거지를 알아내고 포도청에 고발함으로써 일망타진되었다.

하지만 ‘칠서의 옥’ 은 단순한 강도사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이첨 등 대북파의 중심 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몰아낼 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자금을 모아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얻어낸 것이다.

 

또 사건의 취조 과정에서 인목대비와

 그 아버지 김제남이 광해군을 양자로 삼았던

의인왕후의 능에 무당을 보내 저주했던 일이 발각되기도 했다.

결국 김제남은 사약을 받았고

 

그의 세 아들도 화를 당했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가 이듬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인, 남인 세력이 완전히 제거되,

대북파가 정권을 독점하게 되었다.

계축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계축옥샤 라 한다.

 

作成者 黃圭源


2015년3월15일 광해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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