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독립문의 의미

청정지역 2017. 5. 26. 21:48

♡ 서울 독립문의 의미 ♡

서울 서대문에는 독립문(獨立門)이 있어요

그런데 이 독립문은 어느나라에서 독립하였기에 독립문을 세웠을까요?

일본일까요? 아니면 청나라 일까요?

독립문이라 하니까 대다수 사람들은 일본으로 부터 독립를 기념하기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오인(誤認)하고 있지요

그러나 이 독립문은 중국 청나라로 부터 독립한다는 것을 의미 하고 있지요

조선시대 때에는 명의 사신들을 맞이하기 위해 서대문 근처에 영은문(迎恩門)이 있었고

근처에는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관(慕華館)이 있었어요

'영은(迎恩)'은 은혜로운 대국의 사신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모화(慕華)'는 중국을 흠모한다는 뜻이지요

명에 대한 조선의 관계는 극심한 사대주의 즉 소중화사상(小中華思想)으로 이어져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로 교체된 뒤에도 계속되었어요

마치 중국의 한족은 우월한 민족이고 우리민족은 변방에 있는 하찮은 소수민족으로 치부하는 못된 습성을 가지고 있었지요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킨뒤 노골적으로 형제의 관계에서 군신의 관계를 종용하였고

과도한 조공과 책봉 군신관계를 요구하며 우리의 영토를 2번씩이나 침략하였지요

그러나 영원한 권력은 없듯이 청나라도 서서히 파멸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어요

그러다보니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으로 인한 청나라에 대한 반감이 살아나고

예전부터 발해와 고려, 조선을 형님의 나라 상국(上國)으로 받들던 여진족(청나라)에 대한 멸시 등이 복합되면서

반청 감정은 고조되었고 북벌론까지 등장하게 되었지요

당시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를 섬기면서도 내심으로는 명나라를 그리워 했어요

주자학파 서인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은 죽으면서 까지 명나라를 신봉하는 유언을 남김으로

그를 따르는 전국의 유림들은 멸망하여 없어진 중국 명나라의 왕(의종)을 추모하며 제사지내는 웃지못할일도 있었지요

그것이 이른바 속리산 화양서원의 만동묘(萬東廟) 이지요

아무튼 청나라에 대한 반감은 19세기까지 이어졌지요

그러면서 청나라가 유럽 열강과의 전쟁에서 패하기 시작하면서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선언해야 된다는 여론이 강하게 나타났어요

이때 청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더욱 청나라를 배척하게 되었지요

그러자 서재필은 영은문과 모화관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과 독립관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였어요

서재필은 직접 프랑스의 개선문 사진을 보고 이를 참고하여 독립문의 모양새를 직접 스케치하였으며

이 스케치는 1896년 스위스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에게 보내졌지요

1895년부터 서재필은 독립문 건립을 위해 백성들의 성금을 모금하였고

스위스계 우크라이나인인 세레딘사바틴을 영입해 왔어요

서재필은 직접 독립문을 스케치하고 이를 토대로 공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지요

1896년11월에 공사를 시작하여 1897년에 11월에 완공되었어요 높이는 14.28미터, 폭 11.48미터 이지요

약 1,850개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모델로 삼았지요

현판은 김가진이 썼고 현판 바로 아래에는 대한제국 황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문장이 장식되었어요

앞쪽의 기둥 두개는 옛날 영은문의 기둥으로서 철거 후에 남은 부분이지요

독립문의 기공식 때는 대한제국 고종을 비롯한 황족과 고관들이 모두 참여하였으며

이 중 김가진은 삼전도(정축하성)와 병자년(병자호란), 정묘년(정묘호란)의 굴욕을 이제서야 깨트렸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하지요

1979년에 성산대로 공사로 인해 본래의 위치에서 북서쪽으로 70미터 정도 이전하였고

2009년 10월 28일에 서대문 독립공원의 재조성 공사가 완료되면서 독립문은 일반인에게 개방되었어요

현재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현저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건립당시의 위치는 아니고 원래 위치보다 서북쪽으로 70미터정도 들어 옮겨졌지요

그런데 여기서 주지해야 할것은 독립문을 세운 시대는 구한말이고 독립문을 세운 사람들은 한학(漢學)을 공부한 사람들이지요

독립문 건립을 주도한 서재필도 문과에 급제한 수재였어요

당시 독립의 의미는 문자 그대로 홀로(獨) 선다(立)는 뜻으로

독립문은 중국 중심의 전통적인 동아시아 국제질서였던 조공-책봉 체제로부터 완전히 독립하겠다는 뜻이지

절대 일제로부터 독립한다는 의미의 문이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일제강점기가 도래하기 이전에 세워진것이 독립문이지요

의외로 일제와 관련이 있는 독립문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많은데

다시 말하지만 독립문은 구한말에 세워졌으며

일본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지요

추정을 해보자면 독립문 바로옆에 서대문형무소가 있어서 일본과 연관짖는 사람들이 많은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요

다시금 그때의 정치상황을 살펴 보면 당시 고종은 열강들의 각축전 속에서 미국에 가있던 서재필을 불렀어요

그리고 서재필은 1896년 1월에 조선으로 건너와 중추원의 고문이 되었고

그와 동시에 진행한 것이 독립문 건립 운동이었지요

당시 청이 꾸준히 몰락하는 상황에서 청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은 전방위적으로 퍼져있었고

당시 조선 조정에서도 어느정도 공감대를 형성해 나갔어요

서재필은 직접 파리의 개선문을 보고 기본 스케치를 하였고

세레딘 사바친이 설계를 했으며

조선인 건축기사 심의석이 실제로 건축을 하게 되었지요

이때 서재필의 귀국과 실제 독립문 건축 시작의 과정에서 정치적 격변이 일어나지요

바로 1896년 2월에 벌어진 아관파천(俄館播遷)이지요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일본의 입지는 바닥으로 떨어졌어요

이 와중에 친일에 가까웠던 정부 관료는 모두 죽어 나갔지만

서재필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입지를 보존할수 있었고 꾸준히 독립문 건설을 주장할수 있었지요

그리고 이게 설득력을 얻으면서 독립이란 표현이 들어간 최초의 단체가 등장하는데

이것이 바로 1896년 4월 7일 창간된 독립신문이지요

이 독립신문은 정부의 재정지원금 4400원이 들어갈 정도로 고종은 심혈을 기울였고

이에따라 만들어진 단체가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이지요

그리고 이 독립문건립추진위원회가 훗날 독립협회의 모체가 되지요

즉, 독립협회가 독립문을 건립한게 아니고 독립문을 건립하기 위해서 독립협회를 만든 것이지요

단적으로 이 독립문추진위원회 시기는 당시 정부관료 중에서도 외교적 역할을 많이하던 정동 구락부 출신 인사들이 많았어요

그리고 1896년 5월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가 취임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관계가 호전되고 반면에 러시아와 조선관계는 점점 틀어지기 시작하였지요

때문에 대외적으로 독립을 밝힐 필요는 더 커졌어요

중국의 명나라도 조공과 책봉을 요구 했지만 청나라는 더욱 심했지요

과도한 조공과 군신관계 병자호란으로 인한 세자볼모등 그 패악이 극에 달했으며

러일전쟁과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도 서서히 음흉한 흉계를 드러내고 있었고

러시아 또한 믿을 족속이 못되었지요 그래서 고종황제는 대한제국은 자주독립국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하기로 마음 먹었지요

그래서 독립협회를 앞세운 조선 정부의 주도로 독립문 건립은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고

건설 비용은 독립신문과 독립협회가 모금 운동을 벌여 얻은 성금과 왕실의 기증으로 충당했어요

1896년 11월 21일 공사를 시작해서 1897년 11월에 완공되었지요

이 가운데 고종은 1897년 2월 러시아 공사관을 떠나서 경운궁으로 환궁하였고

동년 1897년10월에는 역사적인 대한제국을 만천하에 선포하였지요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나서 독립문은 대한제국의 첫번째 상징적인 문이 되었어요

때문에 최초로 우리나라 태극기가 새겨진 곳이 독립문이지요

이 태극기가 바로 대한제국 시기의 공식 태극기인 독립문 태극기이지요

3.1운동 당시 민중들은 태극기의 정확한 모습을 몰라 경성 사람들은 독립문에 가서 거기 있는 태극기를 보고 그려서 사용하였어요

이러한 이유로 청의 사신을 맞는 영은문(迎恩門)은 헐려지고 그 자리에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을 본뜬 석조문(독립문)을 짓게 되었던 것이지요

여기에는 청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도 포함되는 독립이었으며

이런의미로 고종황제는 우리나라가 자주독립국가라는 것을 만천하에 공포한 것이지요

그런데 요즘 그 치욕적인 사대주의 사상이 또다시 고개를 들고 있어요

요즘의 세계정세가 구한말때와 흡사하게 돌아가고 있지요

미국,일본,중국,러시아등 주변 4강속에 우리의 한반도가 끼어 있어요 북한은 자구책으로 핵무장에 올인하고 있지만

 4대열강들은 핵무장을 용인하지 않고 있지요

그러다 보니 "코리아 패싱"이란 말이 생겨나고 4강들은 우리나라를 배재한체 마음대로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하려 하고 있어요

우리는 여기서 한반도의 생존을 위해서는 냉철한 이성으로 주변4강들의 정세를 심도있게 살펴보고

이에 대응해야 하지요 과연 우리가 살길은 무엇인가를 ......

과연 우리 한반도가 살아 남으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

세상은 변해가고 있어요 피로 맺어진 동맹이라 할지라도 자국의 이익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자국 우선주위가 팽배해 지고 있지요

중국과 북한이 그렇고 한국과 미국도 그렇지요

중국과 러시아는 북한의 핵을 포기해야만 살길이라고 앞에서는 말하고 있지만

뒤로는 슬며시 묵인 또는 방조하며 북한을 부추기고 있지요

그들은 북한이 사회국가 체제이고 친중 친러시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지만 그들의 진짜 속내는 북한을 그들의 완충지대로 사용하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미국과 일본은 사회국가 체제를 부정하는 자유민주국가 이기 때문에 이를 배타하는 면도 있지만

핵미사일이 자국영토까지 넘본다는 것은 도저히 용인할수 없는 일이지요

사실 미국은 우리나라 체제전복을 위하여 북한 정권이 남침한 6.25 전쟁때

무려 6만명이라는 아까운 젊은 병사들을 잃으면서 우리나라를 수호해 주었지요

그러나 중국과 러시아는 어떠했나요?

모든 무기는 러시아에서 제공했고 중국은 총 37개 군단 113개 사단을 참전시켜 약 60만명의 인민군이 인해전술을 펼첬지요

그결과 통일이 눈앞에 다가 왔었지만 중국으로 인해 현재의 휴전선이 고착화 되었고

한반도는 무려 70년간 허리가 잘리는 운명에 이르렀어요

앞으로 펼쳐질 4강 외교 과연 어떻게 해야만 현명한 외교술이 될까요?

자유대한의 운명이 걸린 중요한 시점이 아닐수 없어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 하시는지요?



-* (일송) *-

▲ 건립 초기의 독립문(왼쪽)과, 헐린 영은문 기초(오른쪽) ...


▲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 서재필은 1896년 7월 4일에 발행된

《독립신문》에 게재한 자신의 논평에서 조선이 청나라의 책봉 체제에서

독립한 것을 상징하는 건축물의 필요성을 시사했어요 ...


▲ 독립문 기공식 초정장, "1897년11월 14일자" ...


▲ 1907년경의 독립문 안쪽 전경과 우표 ...



▲ 현재의 독립문 모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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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문' 글씨옆에 태극기가 있고 밑에 대한제국의 문양인 오얏나무가 있음 ...




▲ 영은문과 헐리고 남은 영은문 주초(주춧돌) ...


▲ 중국 사신들이 묵었던 모화관(慕華館) ...


▲ 조선의 세자가 중국 사신을 모화관에서 영접하는 모습 ...



▲ 지금은 모화관이 독립관이 되었지요...



▲ 송재 서재필 동상 앞으로 보이는 독립문 ...



▲ 우리나라 독립문의 모델이 되었던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