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도록 가슴에 새기자.
3월1일
서슬퍼런 총칼앞에서 맨손으로
독립을 외치며 백의민족의 부활을 위해
스스로 삶을 던졌던 그날.
6월25일
그 어느 누구나 죽음과 삶의 경계선이
모호 할 만큼 수 천만의 목숨이 맥없이
스러져버린 전쟁.
침략과 전쟁을 극복하고
오늘을 주신 조상님전에
삼가 예(禮)를 올립니다.
이 땅의 평화와
번영을 빌고빌고 또 빌고 빕니다.
미국 아일랜드에 사는 허브 브라운 선생님.
그는 태어나자 마자 1930년대 대공황의
경제적 고난의 세상에 던져졌다.
그는 먹을것을 찾아
길거리를 해매고, 입을거리를 찾아 주변을 기웃거리면서도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대학에
합격하였건만, 학비가 없어 휴학을 하고
알바를 뛰어 열심히 돈을 모았다.
하지만 복학도 하기전에 징집영장을
받고 한국의 오산공군기지로 갔다.
한국은 전쟁으로 나라가
온통 황폐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는 상태였다.
특히 어린 고아들은 오갈 데가 없었다.
그 들은 부대주변을 떠돌면서 우리를
<핼로, 핼로> <핼로 아저씨>라
부르며 손을 내밀었다.
겨우 누더기를 걸친체
철조망으로 둘러싸인 부대 울타리로 다가와
손짓 몸짓을 해가며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달라고 애원 하였던 것이다.
그때 우리는
'주면 줄수록 더 많이 몰려온다'는
이유 하나로 그들에게 아무것도
주지 말라는 명령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외면 할 수 없었다.
우리도 먹을거리 입을거리가 없는 가난 속에
살아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에 머물던 21개월 동안
금지명령을 어겨가며
철조망 너머 아이들에게
가능하면 많은 음식과
옷가지를 건네주려 애를 썼다.
그때마다 고마워 하며 울먹이던
어린 고아들의 천진했던 얼굴들이
그의 기억에 지금도 생생하다.
그 후 제대명령을 받고 바로 귀국하여
대학에 복학하기 위하여 일본을 거쳐
하와이로 간 뒤 매일 밤
이륙하는 군용기에 편승하기로 하였다.
그가 하와이 출국장에 도착한 그날 밤
6명의 동료들과 줄을 지어 귀국 군용기
탑승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들 중 3명만
이번 군용기에 탑승하고 3명은
다음에 출발하는 군용기로
밀려났고 그는 맨끝에 서 있었다.
그는 다음에
출발하는 군용기를 타고 눈을 붙였다.
그런데 얼마 후
앞서 이륙한 군용기가 추락해
먼저 탄 동료 3명을 포함한 모든 탑승객이
사망했다는 소식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는
'하늘이 왜 나를 살리셨을까?' 라고
울부짖다가 그에 대한 하늘의 답을
듣고서야 진정할 수 있었다.
<그 동안 고아들에게 베풀었던
그 마음으로 착하게 살아가거라.>
그는 귀국 직후 이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조그만 <기념물>을 만들었다.
90세가 넘은 그는
요즘도 그 동안 계속 다녔던 집 근처의
재향군인공원의 어느 큰 나무밑으로 가서
길고 긴 묵념을 빼놓치 않는다.
그 나무밑에 오래전에 그의
<한국전쟁 기념물> 을 묻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 기념물은 자그마한 돌판으로
그 돌에 이렇게 새겨 넣었다고 한다.
<한국전쟁 고아들 -브라운의 가족>
♡ 알뜰고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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