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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申師任堂)

청정지역 2013. 2. 27. 10:18


신사임당(申師任堂)

(1512(중종 7)∼1559(명종 14)
이름은 인선. 호를 思任堂 또는 姙師齋라고도 했다
어진 어머니이자  현숙한 아내이며 뛰어난 여류
서화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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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의 예술적 환경

사임당으로 하여금 절묘한 경지의 예술세계에 머물게 한
중요한 동기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는 현철한 어머니의 훈조를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환경을
가졌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는 완폭하고 자기주장적인
유교사회의 전형적인 남성 우위의 허세를 부리는 그러한
남편을 만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녀의 남편은 자질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도량 넓은 사나이였다는 점이다.

먼저 그의 혼인 전 환경을 보면 그의 예술과 학문에 깊은
영향을 준 외조부의 학문은 현철한 어머니를 통해서
사임당에게 전수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면서
학문을 배웠고, 출가 뒤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에서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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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행할 수 있었다.이러한 어머니에게 훈도를 받은 명석한
그녀는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 시가로 가면서 지은
유대관령망친정 踰大關嶺望親庭〉이나 서울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면서 지은 〈사친 思親〉 등의 시에서 어머니를 향한
그녀의 애정이 얼마나 깊고 절절한가를 알 수 있다.
이것은 어머니의 세계가 사임당에게 그만큼 영향이 컸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교적 규범은 여자가 출가한 뒤는 오직 시집만을 위하도록
요구하였는데도 그것을 알면서 친정을 그리워하고 친정에서
자주 생활한 것은 규격화된 의리의 규범보다는 순수한
인간본연의 정과 사랑을 더 중요시한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예술 속에서 바로 나타나듯이 거짓없는 본연성을 가장
정직하면서 순수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예술성을 보다 북돋아준 것은 남편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이 친정에서 많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남편과
시어머니의 도량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남편은 사임당의 그림을 사랑의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로
아내를 이해하고 또 그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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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는 아내와의 대화에도 인색하지 않아 대화에서 늘 배울 것은
배우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였다.
사임당의 시당숙 이기(李 )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문하에 가서 노닐었다. 이기는 1545년(인종 1)에
윤원형(尹元衡)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크게 화를 입혔던 사람이다.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나 이와같은 사람과 남편이 가까이
지내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남편에게 어진 선비를 모해하고
권세만을 탐하는 당숙의 영광이 오래 갈 수 없음을 상기시키면서
그 집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고 권하였다.
이원수는 이러한 아내의 말을 받아들여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후손과 작품
사임당의 자녀들 중 그의 훈도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은
셋째 아들 이(珥)이다. 이이는 그의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하였는데, 그는 여기에서 사임당의 예술적 재능, 우아한 천품,
정결한 지조, 순효(純孝)한 성품 등을 소상히 밝혔다.

윤종섭(尹鍾燮)은 이이와 같은 대성인이 태어난 것은
태임을 본받은 사임당의 태교에 있음을 시로 읊어 예찬하였다.
사임당은 실로 현모로서 아들 이이는 백대의 스승으로,
아들 이우(李瑀)와 큰딸 이매창(李梅窓)은 자신의 재주를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그녀의 그림·글씨·시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운데, 그
림은 풀벌레· 포도· 화조· 어죽(魚竹)· 매화· 난초· 산수 등이
주된 화제(畵題)이다.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여서 풀벌레 그림을
마당에 내놓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종이가 뚫어질 뻔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녀의 그림에 후세의 시인·학자들이 발문을 붙였는데
한결같이 절찬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는데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글씨로는 초서 여섯폭과 해서 한폭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 몇 조각의 글씨에서 그녀의 고상한 정신과 기백을 볼 수 있다.

1868년(고종 5) 강릉부사로 간 윤종의(尹宗儀)는 사임당의
글씨를 영원히 후세에 남기고자 그 글씨를 판각하여
오죽헌에 보관하면서 발문을 적었는데, 그는 거기서 사임당의
글씨를 “정성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고 정결하고
고요하여 부인께서 더욱더 저 태임의 덕을 본뜬 것임을 알 수 있다.”
고 격찬하였다.



가지와 방아개비





수박과들쥐





어숭이와 개구리





산차조기와 사마귀





맨드라미와 쇠똥벌레





원추리와 개구리





양귀비와 도마뱀





오이와개구리



그녀의 글씨는 그야말로 말발굽과 누에 머리〔馬蹄蠶頭 라는
체법에 의한 본격적인 글씨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절묘한 예술적 재능에 관하여 명종 때의 사람
어숙권(魚叔權)은 《패관잡기》에서 “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절묘하여 평하는 이들이 ‘안견의 다음에 간다.’ 라고 한다.
어찌 부녀자의 그림이라 하여 경홀히 여길 것이며, 또 어찌
부녀자에게 합당한 일이 아니라고 나무랄 수 있을 것이랴.”라고
격찬하였다.

그녀의 여섯 폭짜리 초서가 오늘까지 전해진 경과를 보면,
사임당의 넷째 여동생의 아들 권처균(權處均)이 이 여섯폭
초서를 얻어간 것을 그 딸이 최대해(崔大海)에게 출가할 때
가지고 가 최씨가문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하였다.

그런데 영조 때에 이웃 고을 사람의 꾐에 빠져 이를 빼앗겼다가
어렵게 되찾아 그뒤 최씨집안에서 계속 보관하게 된 것이다.
지금도 강릉시 두산동 최씨가에 보관되어 있으며, 윤중의에 의하여
판각된 것만이 오죽헌에 보관되어 있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紫鯉圖〉, 〈산수도 山水圖〉,
(초충도 草蟲圖〉, 〈노안도 蘆雁圖〉, 〈연로도 蓮鷺圖〉,
(요안조압도 蓼岸鳥鴨圖〉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

ㅡ신사임당의 시ㅡ

대관령은 넘어서 친정을 바라보다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가는 이 마음
돌아보니 북촌은 아득도 한데
흰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어머님 그리워
산 첩첩 내고향 천리언마는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외로이 뜬 달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 모래톱에 헤락 조이락
고깃배들 바다 위로 오고가려니

언젠가 강릉길 다시 밟아 가
색동옷 입고 앉아 비느질할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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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임당 묘, 경기도 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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