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중국의 4대미인

청정지역 2016. 11. 1. 14:00

              


▲ 중국의 4대미녀


    ◇ 절세가인(중국의4대미인) ◇ 1. 춘추전국시대 때의 서시 - 침어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구천(재위 BC 496∼BC 465)때 서시(西施)라는 미녀가 있었어요 그녀는 현재의 절강성 사람으로 성은 시(施)이고 이름은 이광(夷光)이며 별명은 서자(西子)이지요 서시가 살던 마을 저라촌은 동서로 나뉘어져 있는데 서시는 서쪽에 살았기 때문에 서시라고 불리게 되었어요 서시가 바로 '침어'의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다 하는데 그 전하는 이야기는 다음과 같아요 서시가 어느날 시냇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물 속의 고기들이 그녀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넋을 잃고 바라보며 자신들이 서시보다 못생긴 것에 부끄러움을 느끼고는 감히 떠오를수 없어 모두 물 속으로 가라 앉았다고 하지요 그래서 침어(沈魚)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하네요 기원전 494년 오나라와 월나라가 전쟁을 하였는데 월나라는 패하여 오나라의 속국이 되었어요 월나라는 많은 보물을 오나라에 바치고 신하의 나라로 자처하게 되었지요 월나라왕 구천(句踐)은 미인계를 쓰리라 결심하고 자신의 심복인 범려(范蠡)에게 월나라에서 제일가는 미인을 찾아오라고 명 하였어요 범려는 완사계(浣紗溪)에서 빨래를 하고 있던 서시를 보고 한눈에 반하게 되었지요 그러나 남녀의 정보다는 국사를 우선해야 하므로 사나이 대장부의 피끓는 마음만 간직한채 한눈에 반한여인 서시를 데려다 구천에게 주어 오왕 부차(夫差)에게 서시를 바치게 하였어요 서시는 오나라에 간 후에 자신의 미모를 이용하여 오왕 부차를 주색에 빠지게 하여 국사를 돌보지 못하게 하였지요 그러면서 부차왕의 오른팔인 대장군 오자서를 이간질하여 군사력을 약화시켰어요 그런후에 월왕 구천은 오나라를 공격하니 와신상담(臥薪嘗膽)의 숙원을 풀게 되었지요 서시의 일생은 전기적인 색채가 많아요 산촌에서 빨래하던 일개 여자가 나라의 복원이라는 중책을 맡고 결국 사명을 다 하였어요 동시에 자신의 미모와 재능도 마음껏 뽑낼수 있었지요 서시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많아요 그중에『효빈』(效嚬 흉내낼효,눈살찌푸릴빈)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는 "눈살을 찌푸리는 것을 흉내낸다"는 뜻으로 쓸데없이 남의 흉내를 내어 세상의 웃음거리가 됨을 비유하는 말이지요 서시는 가슴앓이병이 있었다고 하지요 어떤 학자는 이 가슴앓이 병이 지금으로 말하면 폐결핵이라고 말하고 있어요 자료에 보면 서시의 피부가 너무 고와서 세상에서 가장 희다는 뜻으로 『천하백(天下白)』 이라고도 하였는데 폐결핵에 걸리면 얼굴이 희다못해 창백해 진다고 하지요 그래서 그런지 서시는 가슴이 아파 늘 가슴에 손을 얹고 눈살을 찌푸리곤 하였는데 워낙 서시가 미인이기 때문에 이마저도 아름답게 보였지요 그런데 동쪽 마을에 동시(東施)라는 아주 못난 여자가 살고 있었어요 어느날 선천적인 가슴통증이 있었던 서시가 길을 가다 갑자기 통증을 느껴 두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고 이맛살을 찌푸렸는데 그것을 본 동시는 그것이 서시가 남들에게 미인으로 인정받는 행동이라 생각하고 자기 동네로 돌아와 자신도 가슴을 쥐어뜯으며 이맛살을 찌푸리며 돌아 다녔다고 하네요 남들이 모두 서시의 찡그린 모습도 예쁘다고 칭찬하자 자신의 얼굴은 생각지도 않고 따라한 것이지요 그리하여" 동시효빈(東施效嚬)"이란 말이 생겼다고 하지요 『서시빈목(西施嚬目)』『서시봉심(西施捧心)』이라는 말도 같은 뜻이지요



    월나라가 오나라를 이긴 후에 서시는 고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곤 월나라의 대장인 한눈에 반한 남자 범려와 함께 은둔의 생활을 하며 일엽편주에 몸을 맡기고 서호를 떠났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서시의 미모에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조차 잊은 채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할만한 절세가인 뒤늦게라도 사랑하는 님과 함께 남은 여생을 보낸 행복한 여인 이었지요


    2. 한나라의 왕소군 - 낙안



    두번째는 한원제(漢元帝)시대에 그 유명한 "왕소군(王昭君)"이 있었지요 경녕(竟寧) 원년(BC 33), 남흉노(南匈奴)의 선우(單于) 호한야(呼韓邪, 재위 BC 58∼ BC 31)가 한원제를 알현하기 위해 장안(長安)으로 왔어요 호한야는 모피와 준마 등 많은 공물을 가득싣고 장안으로 와서 원제에게 매우 공손하게 문안 인사를 올렸지요 한나라의 변경(邊境)을 어지럽히던 흉노족 수장이 화의를 청하고자 찾아 왔으니 이를 크게 기뻐한 원제는 성대한 연회를 베풀어 호한야를 환대하였는데 이 자리에서 호한야는 원제에게 당돌하게도 황제의 사위가 될 것을 청하였지요 호한야는 한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거칠은 흉노족이었으나 무시할수 없는 존재 였지요 원제는 그의 청을 어쩔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하고 공주를 시집보내기 전에 먼저 그에게 한나라 황실의 위엄을 거창하게 과시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자신의 후궁들 중에서 아직 성은을 받지못한 미녀들을 불러와 술을 권하게 하였지요 이 일의 중요성을 알아차린 후궁들은 이번이 황제의 주목을 받을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제각기 최고로 예쁘게 치장하고 황제의 환심을 사고자 노력 하였어요 궁녀들이 줄지어 들어오자 호한야는 궁녀들의 뛰어난 미모에 한동안 넋을 잃고 바라보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절색의 미녀를 발견하고 시선을 그곳에 고정시켰지요 그리고는 즉시 원제에게 또 다른 제의를 하였어요 "황제의 사위가 되기를 원하였지만 꼭 공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저 후궁들 중의 한 명이어도 괜찮습니다 " 원제는 원래 종실의 공주들 중에서 한 명을 주려고 하였으나 지금 궁녀들 중에서 한 명을 선발한다면 종실 공주를 안주어도 되겠기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호한야의 제의를 즉석에서 수락하였지요 그러면서 원제는 호한야에게 후궁중에 한명을 직접 선택하도록 하였고 호한야는 그 자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소군"을 지적하며 이를 뽑았다고 하네요 그런데 쾌재도 잠시 뿐 ... 원제는 호한야가 가리키는 손 쪽을 보니 과연 그곳에는 천하절색의 미녀가 사뿐히 절을 올리는게 아닌가! 곱고 윤기 있는 머릿결은 광채를 발하고, 살짝 찡그린 두 눈썹엔 원망이 서린 듯 너무도 아름다운 왕소군의 미모에 원제도 그만 황홀경에 빠지고 말았어요 그러나 황제로서 한번 내린 결정을 다시 번복할수는 없었지요 연회가 끝난후 원제는 급히 내당으로 들어가 궁녀들의 초상화를 확인해 보았어요 그런데 왕소군의 그림이 본래의 모습과는 천양지차로 얼굴에 죽은깨가 다닥 다닥 그려져 있었지요 그 순간 원제는 화공(畵工) 모연수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토록 명하였어요 진상은 이러했지요 그 시대 궁녀들은 화공에게 잘 보여야만 했어요 그래야만 왕의 눈에 발탁 될수 있었으니까요 그 많은 궁녀들 중에서 미모의 궁녀를 일일히 찾기란 왕으로서도 불가능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화공을 시켜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왕은 초상화를 보고 수청을 들도록 하였어요 그러다 보니 궁녀들은 당연히 온갖 뇌물을 바치며 화공에게 잘 보여야만 했지요 그러나 왕소군은 가난하여 바칠 재물이 없었어요 그리하여 화공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죽은깨가 가득한 추녀로 그린 것이지요 예나 지금이나 돈의 위력은 대단 했어요 모연수는 결국 황제를 기만한 죄로 참수되었지요 그후 원제는 왕소군의 미모가 너무도 아까운 나머지 그녀를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어요 그러나 원제는 호한야에게는 혼수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니 3일만 기다리라고 속이고 그 3일 동안 왕소군과 못이룬 정을 나누었다 하였지요 원제는 왕소군을 조용히 미앙궁(未央宮)으로 불러 사흘밤 사흘낮을 함께 보냈어요 3일후 왕소군은 흉노족 차림으로 단장을 하고 미앙궁에서 원제에게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고하였으며 원제는 그녀에게 "소군(昭君)"이라는 칭호를 내렸지요 왕소군은 원제의 명으로 한나라를 떠나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에게 시집가 연씨(閼氏)가 되었고 아들 하나를 낳았어요 호한야가 죽은뒤 호한야의 본처의 아들인 복주루 선우(復株累單于)에게 재가하여 두 딸을 낳았지요 왕소군은 흉노에게 시집가서 오히려 행복한 일생을 산 미인인 셈이지요 "기러기도 떨어진다"는 낙안(落雁) 미녀 왕소군(王昭君) 왕소군의 이름은 장(궁녀벼슬이름 장)이며 소군(昭君)은 그녀의 자이며 서한 원제시대 사람으로 고향은 지금의 호북성이지요 어려서부터 인물이 출중하고 영리하였다고 하는데 전해지는 바로는 왕소군이 국경을 넘어 흉노족에게 시집을 갈때 등에 지고 있던 비파를 내려 말 위에서 애절하게 원제를 그리며 한 곡조를 뜯고 있었어요 그 곡이 어찌나 슬픈지 멀리 남쪽으로 날아가고 있던 기러기떼들이 귀 기울여 듣고 있다가 왕소군의 미모를 보고는 너무 놀래서 나는 것조차 잊어버리고는 떨어졌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기러기가 떨어진다는 뜻의 낙안(落雁)이란 말이 생겨났다 하네요 다시말해 왕소군의 운명을 결정지은 사건의 전말은 이랬지요 왕소군이 17살 때에 한나라 원제는 천하의 미녀를 찾는다고 포고하였어요 왕소군은 이때 미녀로 뽑혀 후궁으로 들어가게 되었지요 당시의 황제는 사치스럽고 음탕하여 후궁들을 몇천명이나 두었으므로 원제는 화공이 그린 초상화를 보면서 밤마다 잠자리를 함께 할 후궁을 선택하였어요 수많은 후궁들은 황제의 처소에 들기 위하여 화공에게 좀더 예쁘게 그려달라고 뇌물을 주기에 바빴지요 그러나 왕소군은 집이 가난하여 뇌물을 줄수도 없었지만 뇌물 같은 것을 줄줄도 몰랐기 때문에 화공은 왕소군의 얼굴에 주근깨를 그려 넣어 밉게 만들어 한번도 황제의 처소에 들지 못하고 후미진 궁 안에서 비파를 벗삼아 오랫동안 지내게 된 것이지요 훗날 중국사가들은 왕소군이 자신을 희생하여 국경을 넘어 흉노에게 시집을 갔다고 기록하고 있어요 한 원제는 왕소군이 국경을 넘은 것을 안타까워 하면서 이를 기리기 위하여 이 해를 '경녕(竟寧)'이라 개원하였는데 그 뜻은 변경이 안녕하다는 뜻이라 하지요 한 원제는 그녀를 그리워 하면서 왕소군이 떠난지 3개월 뒤 생을 마감했다 하네요


     


    호한야 선우는 왕소군을 '영호알씨(寧胡閼氏)'에 봉하였는데 왕소군을 흉노의 황후로 맞아들인다는 뜻으로 이때부터 국경은 평온을 찾았다고 하지요 역사가들은 왕소군이 고국을 위해 흉노에 가서 우호를 맺음으로 그 영향이 후세에까지 이르렀다고 칭찬을 하였으며 주은래도 일찍이 왕소군을 "중화민족을 대가족으로 단결하도록 하는데 가장 공헌한 인물"이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하네요 역사서에서는 왕소군이 "스스로 자청 하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역사서의 기록일뿐 왕소군이 정말 그랬을까는 미지수이지요 중국에서는 역대로 왕소군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이 있는데 7백여수의 시가 남아있으며 또한 소군출새(昭君出塞)라 하여 소설, 희곡 작품도 많이 있어요 이백, 두보, 백거이, 왕안석등도 왕소군에 대해 시를 썼으며 두보는 왕소군의 무덤까지 찾아가 술 한잔을 올리기도 하였지요 또한 근현대 작가인 곽말약, 조우(曹禹), 전한(田漢), 노사(老舍) 등의 작가들도 왕소군에 관한 작품을 썼어요 왕소군의 일생에서 중국인들의 단결력을 기가 막히게 엮은 것이지요


    3. 삼국시대의 초선 - 폐월



    다음은 초선(貂蟬)인데 중국 위오축 삼국시대(AD 220~280)에 나오는 인물로 한나라 대신 왕윤(王允) 의 양녀로 용모가 명월 같았을 뿐 아니라 노래와 춤에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하지요 어느날 저녁에 화원에서 달을 보고 있을때 구름 한 조각이 달을 가리웠어요 왕윤이 말하기를 "달도 내 딸에게는 비할수가 없구나. 달이 부끄러워 구름 뒤로 숨었다." 고 하였지요 이때 부터 초선은 폐월(閉月)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하네요 초선은 왕윤의 뜻에 따라 간신 동탁과 여포를 이간질 시켜 동탁을 죽게 만든후 여포와 깊은 사랑을 나눈후 의로운 목숨을 거둔다고 전해지고 있어요 그러나 실제로는 여포가 동탁을 죽이고 난 후 동탁의 잔당이 다시 집권하자 여포의 친구가 초선을 숨겨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사실이라면 초선은 동탁이 죽은후에 여포의 품으로 갔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요 아무튼 삼국지에는 여포의 애첩 초선이 미인계로 동탁을 죽게 만든것은 사실이며 그후 여포는 그 누구보다도 초선을 사랑했으며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전장에도 데리고 다닐 정도였다 하지요 여기서 삼국지의 일부를 소개하면 장안을 떠난지 2년 여포는 영토가 없는 장군의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방랑하였지요 초선과 여포가 동탁을 죽여 공을 세운 대가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그에 비해 조조는 동탁의 죽음으로 세력을 확장하고 황건적을 쳐 그 잔영을 자기 군에 편입시켜 진동장군이라는 칭호를 조정에서 받게 되었지요 조조의 군사는 10만을 넘었어요 서주에서의 마지막 전투 초선은 말하였지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를 조조에게 넘겨주고 도망가세요.” 그러나 여포는 초선을 포기하지 않았지요 그 순간 초선은 여포의 천명이 여기서 끝나리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자신의 운명도 마찬가지 였지요 그날 밤 초선의 침소에 조조의 밀서를 가지고 온 사자가 찾아 왔어요 <여포는 이제 끝장이다. 나에게 돌아오라.> 초선은 수고했다고 말하고, 허나 조조의 부름에 응할수 없노라며 사자를 돌려보냈어요 초선에게는 절망의 눈이 내렸지요 그 와중에 여포에게 불만을 품은 신하들 가운데 배신자가 나왔어요 적토마를 도적맞은 채 잠자다 결박된 여포는 성 밖으로 끌려나와 처형되었지요 초선은 결국 마지막 선택을 하지요 독을 탄 술을 마시고 피를 토하며 쓰러졌어요 조조는 그 싸늘한 몸을 안고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하지요 이 기묘한 운명…. 병사들은 그녀가 여포에게 바친 사랑에 감격하여 적과 동지를 가리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두 사람을 제사 지냈다고 하네요



    그런데 초선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지만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초선과 관우와의 로맨스이지요 관우가 조조에게 항복했을때 조조는 관우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많은 미녀들을 선물했는데 이 중 하나가 초선이였지요 관우는 초선의 절세의 아름다움에 반했고 초선은 관우의 영웅적인 모습에 반하여 서로 깊이 사랑하게 되었지만 초선으로 인하여 유비에 대한 충성심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관우는 초선에게 자결을 명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이와 같은 이야기는 삼국지에도 없고 낭설일 가능성이 많아요 설사 조조가 아무리 관우를 아꼈다고 해도 절세의 미녀들을 좋아했던 조조가 초선을 관우에게 내어 주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을테니까 말이지요


    4. 당나라의 양귀비 - 수화





    중국 당나라 현종(玄宗 : 685~762) 때인 719년, 경국지색(傾國之色), 절세가인(絶世佳人)의 상징인 양귀비(楊貴妃; 719~756)는 태어났어요 본명이 양옥환(楊玉環)인 그녀는 빼어난 미모와 총명함 그리고 가무에 뛰어난 솜씨를 지녀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시대의 흐름을 바꾸면서 일세를 풍미하다 3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되지요 당현종이 나라도 팽개치고 연애에만 몰두하게 만들었던.그녀는 실제 얼마나 이뻤을까? 중국인들이 기억하고 있는 양귀비는 약간 통통한 몸매에 쌍거풀은 없지만 묘한 매력을 풍기는 모습이었다 하지요 초상화는 실제 양귀비가 살았던 중국황제의 별장 당화청궁(唐華淸宮)에 걸려있는 그림을 다시 그린 것이지요 양귀비는 체중이 79kg이나 됐다고 하니 초상화와 같이 실제로도 통통한 모습일 가능성이 높아요 당화청궁은 큰 호수로 이뤄져 있어 화청지(華淸池)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황제와 양귀비가 사용했던 목욕탕들도 있고, 연못 주변에는 웅장한 건물들이 둘러서 있어요 예전에는 장안이라 불리웠던 섬서성 서안에 있다고 하지요 당현종 이융기(唐玄宗 李隆基 685-762)는 당 예종 이단의 3남으로 어머니는 숙명황후 유씨이고 고모할머니가 바로 중국역사상 유일한 여황제로 유명한 무측천(則天武后, 624~705)이지요 현종은 황제등극 초기에는 중국 역사에서 가장 백성들이 살기 좋은 태평성세를 누렸으며 개원의치(開元之治)라 불릴 정도로 훌륭한 재상들을 주변에 두고 정치를 잘 하였으나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무혜비(武惠妃 699~737)의 사망과 양귀비와의 만남으로 인해 몰락한 군주가 되었어요 양귀비(楊貴妃)는 애초에 현종과 무혜비의 18번째 왕자 수왕 이모의 궁녀로 17세에 입궁 하였지요 비파연주와 외모가 뛰어나고 제주가 있던 양귀비는 현종의 딸인 함의공주의 결혼식에 연주자로 참석 했다가 수왕의 눈에 띄어 정식으로 수왕의 비가 되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현종이 우연히 자기의 며느리인 양귀비의 어여쁜 자태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해 버렸어요 그날 이후부터 현종은 양귀비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아무일도 할수가 없었지요 그러자 현종은 자신의 측신이자 당대 최대의 권력가인 환관 고력사를 불러 이 일을 의논 하였어요 결국 고력사는 양귀비의 두 몸종을 매수하여 그녀들에게 양귀비의 마음을 돌리도록 하였지요 양귀비의 몸종들은 매일같이 양귀비를 설득하였으며 양귀비도 본래 수왕에 대한 사랑보다는 부귀영화에 더 욕심이 있었기에 일단 수왕을 떠나기로 결심하였어요 수왕을 떠난 양귀비는 우선 화산으로 가서 여도사 생활을 하다가 다시 현종의 궁으로 들어왔지요 양태진이란 이름은 바로 양귀비가 여도사 생활을 할때 얻은 호였어요 이때 현종은 아들 수왕에게 미안했든지 위씨성을 가진 여인을 아내로 삼도록 배려하였지요 현종은 자기의 품으로 돌아온 양귀비를 위해 궁궐을 하나 마련해주고 그것을 태진궁이라 하였으니 그로부터 이 태진궁은 그들만의 사랑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어요 양귀비는 공식으로 황후 책봉을 받은 적은 없으나 천보 4년에 "귀비"에 책봉된 이후 이미 고인이 되고 없는 황후의 위치를 대신하다시피 하였지요 양귀비가 "귀비"에 책봉된 이후로 그녀의 죽은 부친은 대위제국에 추서되고 숙부는 광록경에 임명되었어요 뿐만 아니라 큰오빠는 홍로경, 작은오빠는 시어사, 남동생은 사공에 임명되었으며 큰언니 옥패는 한국부인, 셋째언니 옥쟁은 괴국부인, 여덟째언니 옥차는 진국부인에 봉해졌지요 현종의 극진한 총애로 단숨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된 양귀비의 형제자매들은 그 세력이 강대해져 궁궐도 마음대로 출입할수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막강한 권세를 과시하며 많은 사람들을 농락하기 시작했어요 특히 그녀의 셋째 언니 괴국부인의 집에는 전국 각지에서 청탁을 하러 찾아오는 관리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그들이 바치는 진상품들로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고 하지요 한번은 괴국부인이 궁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공주와 부마의 행열과 마주쳤는데 서로 길을 양보하지 않다가 큰 싸움이 일어나고 말았어요 마침내 이 사실을 알게 된 현종은 평소 공주에게 주었던 물건들을 모두 빼앗고 부마의 관직마저 박탈하였지요 궁궐 내에서 그들의 위치가 공주나 부마보다도 위에 있었던 것이지요 양귀비의 언니들도 비록 양귀비에는 미치지 못하였지만 모두 뛰어난 미색을 갖춘 여인들이었어요 어느날 현종은 괴국부인과 눈이 맞아 양귀비를 배신하고 그녀와도 정사를 벌였지요 나중에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양귀비의 마음속에 질투의 불길이 솟아 올라 현종이 또 양귀비에게 괴국부인을 입궐시키라고 하자 양귀비는 현종의 명을 거역하였어요 급기야는 이 일로 현종과 대판 싸움을 벌이게 되고 크게 노한 현종은 고력사에게 명하여 양귀비를 양국충의 집으로 쫓아보내게 했지요 당시에 승상이었던 양국충은 양씨 집안에서 양귀비 다음으로 유명한 인물이었어요 아주 음흉한 성격의 소유자인 양국충은 젊은 시절에는 고향 영락에서 술과 노름으로 방탕한 생활을 보냈지요 후에 군에 입대하여 전쟁에서는 용맹을 떨쳤지만 평소에는 늘 사람들을 괴롭히는 등 온갖 만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결국 직위를 박탈당하고 쫓겨났었지요 그뒤 다시 선우중통의 집에서 집안일을 관리하면서 하인들의 돈을 가로채 양귀비의 집으로 도망쳤어요 그때 양국충은 지금의 괴국부인인 양옥쟁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던 사이었지요 따라서 괴국부인으로 인해 시끄러워진 이번 일을 가장 잘 해결할수 있는 사람은 바로 승상 양국충이었던 것이지요 양씨 일문의 운명이 양귀비의 손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국충은 고력사와 합심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화해시키기로 하고 현종과 양귀비를 화청지로 보내어 그곳에서 현종은 양귀비를 품에 안게 되었어요 다시금 양귀비를 품에 안자 그간의 다툼은 사라진지 오래였지요 두 간신의 노력으로 다시금 양귀비를 품에 안을수있게 된 현종은 양귀비를 더욱 아끼고 사랑하였어요 양귀비의 품속에서 환락에 빠져 유희와 쾌락에 정신을 잃은 현종에게서 더이상 지난날 성군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게 되었던 것이지요 현종은 전기에는 두 명의 명재상 요숭과 송폭의 보좌로 "개원성세"를 이루어냈지만 후기에는 두 명의 간신 이림보와 양국충의 전횡으로 "천보대란"을 맞이하였지요 "천보대란"이란 바로 당나라를 쇠망의 길로 이끌고 양귀비를 죽음의 길로 데려간 "안록산의 난"을 말하는데 영주유역의 호인 출신인 안록산은 처음에는 변방의 일개 군졸에 불과하였으나 후에는 세 지역을 다스리는 절도사로 승승장구하면서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되었지요 안록산이 이렇게 세력을 얻게 된 것은 순전히 양귀비 때문이었어요 천보 6년 정월 현종은 변방의 절도사 안록산을 환영하는 연회를 흥경궁에서 열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록산과 양귀비의 첫 만남이 이루어졌지요 그후 안록산은 자유롭게 궁궐을 출입할수 있게 되었고 그러한 안록산을 양귀비는 수양아들로 삼았어요 안록산은 양귀비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아양을 다 떨었고 양귀비는 그러한 안록산의 우람한 몸집을 특히 그의 희고 부드러운 살결을 좋아했다고 하지요 안록산은 현종이 없는 틈을 이용하여 자주 입궐하여 양귀비를 만났으며 양귀비는 그를 화청지로 데려가 목욕을 시켜주며 뜨거운 정사를 나누었지요 이때 양국충은 안록산과 연합하여 이림보를 제거하려 하였으나 이림보가 자연스럽게 먼저 죽자 그들 사이에 세력 다툼이 일어났어요 양귀비를 등에 업고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해 가는 안록산에게 위협을 느낀 양국충은 현종 앞에서 자주 안록산을 비방하기 시작하였지요 양귀비는 자기 애인을 비방하는 양국충의 말을 그대로 안록산에게 전하게 되었고 그후 안록산은 양국충에게 반감을 가지고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어요 현종은 안록산이 반역을 꾀하려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때마다 양귀비가 안록산을 변호해 주어 아무런 손을 쓰지 못했지요 그때 양귀비는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조정의 일마저도 마음대로 주물렀던 것이지요 755년 마침내 안록산은 간신 양국충의 타도를 명분으로 내세우고 범양에서 반란을 일으켜 장안으로 진격해 왔어요 이 소식을 접한 현종은 깜짝 놀라 가랑비 내리는 한여름 새벽에 승상 위견소, 양국충, 양귀비 자매와 소수의 호위병을 거느리고 피난길에 올랐지요 장안성 연추문을 벗어나 서쪽으로 방향을 잡은 일행은 마외파(지금의 섬서성)에 이르렀을때 돌연 병사들이 반목하여 현종에게 양국충과 양귀비를 비롯한 양씨 일족들을 모두 죽이기를 강요하였지요 결국 양국충과 일족들의 목이 잘리고 시신이 갈기갈기 찢어졌으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양귀비도 어쩔수 없이 마외역관 앞의 배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결하였어요 이때 양귀비의 나이 38세였지요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후 당현종은 태상황이 되었고 그의 아들 숙종이 난을 평정하면서 황제가 되었지요 현종은 장안으로 돌아온 후에도 죽은 양귀비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였다고 하지요 그런데 양귀비의 죽음에 관해서는 또 다른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어요 즉 일설에 의하면 안록산의 난때 양귀비가 죽지 않고 일본 상인에 의해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하지요 그로인해 현재 일본에는 양귀비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그녀의 유물과 사당,무덤 등이 전해지고 있어요 믿거나 말거나 38세때 일본으로 건너가서 30년간을 활동하다가 68세에 죽었다는 것이지요 흔히 양귀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수화(羞花)(꽃이 부끄러워 한다)라는 말을 쓰는데 현종과 만나기 이전 어느 하루 양귀비가 정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무성하게 꽃이 핀 모란과 월계화 등을 보고 덧없이 지나가는 청춘을 아쉬워하였어요 그래서 "꽃아! 꽃아! 너는 해마다 다시 피어나지만 나는 언제나 빛을 보겠느냐?"라는 한탄과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 그 꽃을 쓰다듬었어요 그러자 갑자기 꽃받침이 오그라들고 꽃잎이 말려들어갔어요 그녀가 만진 꽃은 바로 함수초였던 것이지요 이때 한 궁녀가 그러한 광경을 보았어요 그후 그 궁녀는 가는 곳마다 "양귀비가 꽃과 아름다움을 견주었는데 꽃들이 모두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다"고 소문을 내었으며 여기에서 "수화"라는 말이 유래되었다고 하네요 장한가(長恨歌)는 현종 붕어 50년후 당대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가 나이 35세때 왕질부의 제의로 시인의 상상력을 발휘해서 지은 산문으로 현종과 양귀비의 비련의 사랑 이야기를 쓴 것이지요 天上人間會相見 천상에든 세상에든 다시 보게 되리라네 臨別殷勤重寄詞 헤어질 즈음 간곡히 다시 하는 말이 詞中有誓兩心知 두 마음 만이 아는 맹세의 말 있었으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고 天長地久有時盡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어떤 사랑이 고귀하고 어떤 사랑이 천한 것인지는 모르지만 현종이 며느리인 양귀비에 빠져지내던 10여년 사이 당시 세계 최강의 당나라 백성들은 고통의 나락에 떨어 졌으며 나라는 혼란에 빠져 들게 되었지요 그러나 당사자들인 현종과 양귀비는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지요 당시 한반도는 신라가 당나라와 함께 고구려(668년)를 명망시키고 통일시대로 접어 들던 시대였어요 하지만 이런 미녀들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서시는 서시의 발은 너무 커서 늘 긴 치마를 즐겨입었다고 하지요 왕소군은 어깨가 흘러 처져서 늘 망토를 즐겨 입었다고 하고 초선은 귓볼이 작아서 언제나 긴 귀고리를 하고 다녔다고 하네요 양귀비 또한 암내가 심해서 향수를 바르고 하루에 목욕을 여러차례 했다고 하지요 해서 옛날부터 완벽한 여자는 없다고 하였지요 5. 조비연(趙飛燕)



    아쉽게도 중국의 4대 미녀에서 탈락한자가 있었으니 바로 조비연(趙飛燕)이지요 연수환비(燕瘦環肥) 즉 조비연은 말랐으나 미인이었고 양귀비는 뚱뚱했으나 미인이었다는 말이지요 이처럼 그녀는 항상 중국의 4대 미녀중 한명인 양귀비와 더불어 거론되지요 조비연은 ‘날으는 제비’라는 뜻으로 본명인 조의주 대신 조비연으로 불렸어요 한성제(漢成帝 BC33~BC72)의 총애를 받아 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조비연(趙飛燕)은 중국사극 '모의천하'에도 등장 하지요 그의 자매 조합덕(趙合德)도 한성제(漢成帝)의 총애를 받은 것으로 나오는데 한서(漢書)에서 왕황후전을 제외하고 여인에 관한 이야기가 긴 것은 조씨 자매가 으뜸이라 하네요 한서열전의 내용을 다 올렸다가는 너무 길어질것 같아 다음으로 미루고 그녀의 초상화만 올려 두기로해요 중국 4대미녀를 말할때 "침어, 낙안, 폐월' 수화" 이라 하지요 침어(浸魚)는 서시이고 낙안(落雁)은 왕소군 폐월(閉月)은 초선 수화(羞花)는 양귀비를 말함이지요 아름다워서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중국 고대의 4대 미녀들!!! 왠지 아름다움 만큼이나 그녀들의 인생은 그렇게 순탄지 않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외모는 아름다웠을지 모르지만 중국 고대의 4대 미녀들의 인생은 아름답지 않았던것 같아요 여러분은 누구에게 한 표를 주시겠어요 ? 남녀간의 사랑은 그 어떠한 장벽이라도 넘어서서 한번쯤은 온몸을 던져 사랑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것이 아닐런지요? -* (일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