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신사임당(申師任堂)

청정지역 2017. 2. 1. 18:59

              

 

 

申仁善 (堂號:師任堂,사임당) 조선시대 중기의 문인이자 유학자, 화가, 작가, 시인,

성별 : 女
생몰년 : 1504(연산군 10)~1551(명종 6) 47사망
국적 : 조선, 한국
아버지 : 신명화(申命和) 본관:평산(平山)
어머니 : 이씨 본관:용인(龍仁)
배우자 : 이원수(李元秀 1504~1561) 본관:덕수(德水)
자녀 : 장남:이선(璿), 장녀:이매창(梅窓), 차남:이번( 번), 차녀:?, 삼남:율곡이이(李珥), 사남:이우(瑀),

          5남:이준 등 7남매(5남2녀) 어떤문헌은 7남매(4남3녀)로 되어있음.

저서(작품)

 신사임당 드라마방영으로 인해 東星學人 신사임당 포스팅 해봤습니다.

 

♣ 신사임당(申師任堂) ♣

 

신사임당은 조선시대의 여류 문인이자 화가였고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사임당은 1504년(연산군 10년) 강릉 북평촌(오죽헌), 외가댁 에서 신명화공의 둘째 딸로 태어나 외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자수와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또한 그녀는 학자의 집안에서 자라나 유학의 경전과 명현들의 문집을 탐독하여 시와 문장에 능했다.
7세 때 화가 안견의 그림을 본떠 그렸을 뿐만 아니라 산수화와 포도, 풀, 벌레 등을 그리는 데도 뛰어난 재주를 보였다.
  
사임당이 어린 시절 어느 날,꽈리나무에 메뚜기 한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을 그렸다.
그런데 사임당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림 속의 메뚜기를 닭이 와서 쪼았던 것이다.
그녀의 그림에 대한 예찬은 많은 사람들의 발문에 기록되고 여류의 으뜸이었다.
  
그림으로 채색화, 묵화 등 약 40폭 정도가 전해지고 있으나 아직 세상에 공개되지 않은 그림도 수십 점이 있다고 한다. 작품으로는 <자리도>, <산수도>, <초충도>, <노안도>, <연로도>, <요안조압도>와 6폭 초서병풍 등이 있다신사임당은 글이나 그림 어느 쪽에서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으나 결코 나타내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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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이 어느 날,잔칫집에 초대를 받아 여러 부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국을 나르던 부엌사람이 어느 부인의 치맛자락에 걸려 넘어져 부인의 치마가 국에 다 젖고 말았다. 
공교롭게도 그 부인은 매우 가난해 잔치에 입고 올 옷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새 옷을 빌려 입고 온 것이었다.
 
그 부인은 수심이 가득해 아무 경황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본 사임당은 그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그 치마를 잠시 벗어주십시오. 제가 수습을 해보겠습니다."
 
부인은 의아했지만 그렇다고 별 뾰족한 방법이 없어 신사임당에게 치마를 벗어 주었다.
신사임당은 붓을 들고 치마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치마에 얼룩져 묻었던 국물 자국이 신사임당의 붓이 스칠 때마다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되기도 하고 싱싱한 잎사귀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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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완성되자 신사임당은 치마를 내놓으며 가난한 부인에게 말했다.
"이 치마를 시장에 내다 파셔요.
그러면 새 치마를 살 돈이 마련될 것입니다."
  
과연 신사임당의 말대로 시장에 치마를 파니 새 비단 치마를 몇 벌이나 살 수 있는 돈이 마련되었다. 
신사임당의 그림은 그때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그림을 사려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그림은 마음을 수양하는 예술이라 생각했던 사임당은 그림을 팔아 돈을 만들지는 않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그 부인의 딱한 사정을 보고 도와주려는 마음에서 그림을 그려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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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은 아이들의 어머니로서도 손색이 없었다.
다섯 아들과 두 딸을 진정한 사랑으로 키웠고 어릴 때부터 좋은 습관을 가지도록 엄격한 교육을 했던 것이다.
사임당의 자애로운 성품과 행실을 이어받은 7남매는 저마다 훌륭하게 성장하여, 모두가 인격과 학식이 뛰어났다.
 
사임당이 33세가 되던 해,꿈에 동해에 이르니 선녀가 바다 속으로부터 살결이 백옥 같은 옥동자 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아기를 잉태한 중에 또 꿈을 꾸었다.
검은 용이 바다로부터 날아와 부인의 침실에 이르러 문머리에 서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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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태몽을 꾸고 난 아이가 바로 셋째 율곡 이이였다.
사임당은 자식 7남매를 훌륭하게 키웠을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도 항상 올바른 길을 가도록 내조하였다. 
어느 날,사임당은 남편인 이공과 10년 동안 서로 헤어져 학업을 닦은 뒤에 다시 만나기를 약속하였다.
약속대로 이공은 사랑하는 부인을 처가에 남겨두고 서울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공은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였다.
사임당은 바느질 그릇에서 가위를 끄집어 내 그의 남편 앞에 놓고 심각하게 이야기하였다.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 어찌 오래 살기를 바라겠는지요?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결이라도 해서 내 인생을 마치는 편이 더 좋을 것입니다."
 
이공은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다시 한 번 굳게 결심하고 부인과 작별하였다.
서울로 올라온 이 공은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열심히 공부하여 뜻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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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사임당은 시부모와 친정어머니를 잘 모셔 지극한 효녀로도 알려졌다.
사임당은 19세에 이원수공과 혼인한 후에 친정 부형이 일찍 별세해 홀어머니 이씨를 모시고 친정에 살면서 서울 시댁과 율곡리(현 경기도 파주)를 내왕하였다.
힘든 가운데도 두 어머니에게 극진한 효도를 하였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

대관령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고...

                       申師任堂(신사임당)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림영)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回首北坪時一望(회수북평시일망)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늙으신 어머니를 강릉에 두고
외로이 서울길로 떠나는 이마음
때때로 고개돌려 북평쪽 바라보니
흰구름 아래로 저녁산이 푸르구나

이 시는 사임당이 38세 때 강릉 친정으로 어머님을 찾아뵙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도중에 대관령에서 오죽헌 쪽을 바라보고 홀로 계신 어머님을 그리며 쓴 詩다.
-조선왕조 야사에서 발췌 윤색-
[출처] http://blog.daum.net/kjpark/1013

-東星學人-

◈ 오죽현(烏竹軒)

 

소재지 : 강원도 강릉시 죽헌동 201번지, 보물 제165호(1963년1월21일)지정
1536년(중종31년)율곡 이이선생이 탄생한 곳으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별당 사랑채로 우리나라 주거 건축 중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이다.
율곡이 태어난 오죽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팔작지붕의 건축물이다. 세종조(世宗朝)당시 공조참판과 예문관 제학의 벼슬에 오른 강릉 12향현 중의 한 분인 최치운에 의해 건립된 조선시대 양반가옥의 별당 사랑채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처음 오죽헌이 지어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600여년 전이다.
오죽헌을 정면서 보면 왼쪽 2칸은 대청으로 사용하게 하였고 오른쪽 한칸은 온돌방으로 사용하게 하였는데, 이 방이 바로 율곡 이이가 태어난 몽룡실이다.
최치운은 이후 오죽헌을 아들인 최응현에게 물려주었고, 최응현은 다시 그의 사위인 이사온에게 물려 주었으며 이사온은 그의 사위인 신명화에게 물려 주었으니 이때 율곡 이이가 태어난 것이다.
문성사는 율곡 이이선생의 영정(影幀)을 모신 사당이며, 어제각은 율곡 이이선생이 어릴때 사용하던 벼루가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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