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황성옛터’의 노래가 탄생된 일화

청정지역 2017. 10. 30. 19:32

              


 황성옛터의 노래가 탄생된 일화


1928지 두환이 이끄는 순회 극단이 만주 일대와 평양공연 하고 있었는데,

무대 감독겸 작사자는 왕 평(王 平)이 맡고 있었다고 한다.

개성에서 공연을 마친 왕 평과 전 수린은 옛 고려의 영화를 되새기면서 달빛 쏟아지는

만월대의 옛터를 찾아 거닐 때, 달빛에 비쳐진 王城의 옛터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폐허가 되어 있었고, 벌레 소리만 쓸쓸하게 울려 퍼질 뿐이었다고 한다.

 

전 수린은 온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하에서 괴로움에 지쳐 있는 터이기에, 만월대의

정경이 더한층 옛날 역사를 회상케 해서 눈물지으며 말없이 돌아왔다고 한다.

그 후에 비 내리는 어느 날 밤, 객지의 여인숙에서 만월대를 거닐었던 그 밤이

회상이 되어, 전 수린은 황성옛터에 대한 악상이 떠올라 바이올린을 들고

즉흥적으로 연주하게 되었고, 그 멜로디를 왕 평이 오선지에 옮겼다고 한다

 

그해(1932) 가을 그들이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할 때, 막간에 이애리수

황성옛터의 노래를 불렀는데, 객석에 있던 관객들의 눈은 눈물로 가득하였으며

흥분한 관객은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고 한다.

절망적일 정도로 애조 띤 이 노래를 듣던 관객들은 망국의 슬픔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이 때부터 이애리수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며 관객도 함께

부르게 되었고,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으로 퍼져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황성옛터는 1932년 이애리수의 노래로 발매되어 순식간에 5민장이 판매되었으나,

조선총독부는 민중에게 조선민족의 자각을 선동할 수 있다고 하여, ‘황성옛터발매를

금지 시켰고 왕평과 전수린은 종로경찰서의 취조를 받고 유치장 신세까지

지게 되었다고 한다. 총독부는 이 노래를 부르는 조선인을 발견하는 즉시 심문하고

취조하였으며 대구의 모 보통학교에서는 창가(음악)시간에 이 노래를 불렀다 하여

음악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성옛터는 꾸준히 불러지게 되었고, 이애리수는 민족의 여인으로

호칭되어졌다고 한다. 군사문화 시대 박정희 대통령은 술좌석에서 늘 황성옛터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황성옛터가요는 일제 강점기시대에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며 불렀고, 노래속의 황성’(荒城)은 주권을 잃은 대한제국을 일컫는 뜻이었다

아리랑과 함께 황성옛터는 애국심을 자아내는 우리 민족의 노래라 말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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