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인 · 고전사

선덕여왕과 삼서제(三壻制)

청정지역 2016. 8. 10. 15:24

어여뿐 선덕여왕

      
      ♣ 선덕여왕과 삼서제(三壻制)  ♣
       옛날 양반집 외아들이 장가를 가려고 하자 처녀 셋이 서로 시집오겠다 하였지요 
      처녀들의 집안, 용모, 예절이 모두 비슷해 며느릿감 가려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어요 
      그래서 양반은 처녀 셋을 불러놓고 "여자는 남자와 달리 입이 둘인데, 위에도 있고 아래에도 있다 
      그런데 윗입과 아랫입 중 어느것이 더 어른인가?" 하고 물었지요.
      첫째 처녀가 대답하는데, "이가 난 윗입이 더 어른입니다." 하자 
      둘째 처녀가 "수염이 무성한 아랫입이 더 어른이지요." 하고 대답했어요 
      셋째 처녀가 "다 옳은 말이나 아랫입은 평생 아기처럼 물려주는 젖만 받아먹는데 
      윗입은 밥 술 등 못 먹는게 없으니 윗입이 더 어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양반은 "옳거니! 음양의 이치를 아는걸 보니 한 지아비를 섬길만 하구나!" 하며 무릎을 탁 첬지요 
      (자료제공 ; 강릉민속문화연구소)
      남자 경험은 없지만 나이가 차면 여자 또한 알만한 것은 모두 아는게 음양의 이치요 자연 법칙이지요
      이야기 속의 셋째 처녀는 체험 않고도 성에 관해 나름대로 꿰뚫고 있는 여자였지요 
      그래서 이를보고 생지안행(生知安行)이라 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알아 쉽게 행 한다는뜻 이지요  
      과거 우리나라엔 여왕이 셋 있었지요 
      신라시대의 선덕여왕, 진덕여왕 그리고 진성여왕이 바로 그들이지요 
      이 중 가장 총명한 선덕여왕은 공주 시절에 
      당나라 태종이 보내온 모란꽃 그림을 받아든 진평왕 앞에서 이렇게 종알 거렸어요
      "아버지! 아름다운 꽃이긴 하나 향기가 없을 겁니다."
      "네가 그것을 어찌 아느냐?" 
      "그림에 나비와 벌이 없지 않습니까?" 
      과연 모란은 향기라곤 없는 꽃이었지요
      그가 여왕이 된지 5년 어느 초봄 어느날
      대궐 서문(西門)밖 영묘사(靈廟寺) 옥문지(玉門池)부근에 난데없이 개구리 떼가 몰려들어 
      밤낮으로 울어대자 선덕여왕은 명을 내렸지요
      "대장군 알천은 날쌘 군사 2천을 뽑아 서쪽 교외 여근곡(女根谷)에 잠복해 있는 적병을 잡아오시오!" 
      이 명을 받은 알천은 군사를 끌고 달려가 여근곡에 숨어 있던 500여 백제 군사를 몽땅 잡아 왔지요
      다녀와 알천은 선덕여왕께 물었지요
      "어찌 아셨습니까?" 그러자 선덕여왕은 
      "개구리의 불거진 눈은 병사의 모양이요 
      여근곡이란 여자의 음부로, 여자는 음에 속하고, 그 빛이 흰데, 흰색은 서쪽이 아니겠소? 
      따라서 내가 일찍이 그 이름을 들은 적 있는 서쪽 변방 여근곡에 적병이 있음을 알았소 
      남근(男根)이 여근 속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는 법이니, 이에 그들을 쉽게 잡을 줄 안 것이오"
      정말 놀라운 사실 아닌가?
      화랑세기에 따르면 신라 여왕들은 모두다 독신이었지요
      이 책의 의하면 독신인 여왕들은 삼서제(三壻制)라 하여 남편을 세명씩 두었다고 하지요
      그러나 선덕여왕은 왕 등극 전에 이미 용수·용춘 형제가 번갈아 남편 노릇을 하였는데 
      이들에게서 아들이 없어서 둘 다 물러났으며 
      즉위 뒤엔 삼서제(三胥制)에 따라 흠반(欽飯)과 을제(乙祭)를 남편으로 삼았지요
      그렇다면 세 번이 아니라 네 번씩이나 섹스 파트너를 체인징 했다는 얘기이지요
      공주나 여왕이 남편을 마음대로 교체할수 있던 신라 왕실 분위기는 가히 여자들의 천국이었나봐요 
      즉위시 나이 쉰 가까웠다고 계산해 보면 당시로선 시들어가는 꽃이었음에도 
      여러 남자와 정열적인 섹스를 즐겼으니 선덕여왕은 그야말로 '즐거운 사라'였던 셈이지요
      신라땅에는 당시 선덕여왕 외에도 많은 일화가 전해 오고 있어요 
      "맛둥방이 남몰래 선화공주를 끌어내 밤마다 서로 사랑을 나누었다네." 
      '삼국유사' 권2 무왕조(武王條)에 실려 있는 '서동요'지요 
      백제 왕자이지만 현실적으론 마를 팔던 장돌뱅이와 밤마다 궁을 빠져나와 
      뜨거운 정을 통했다는 선화공주는 진평왕의 셋째 딸이었어요 
      그렇다면 방만한 섹스를 즐겼던 그 선덕여왕 바로 아래 동생이 아닌가? 
      그야말로 끼 많은 집안이었음을 알수 있지요 
      아니면 그 당시 신라의 여인들은 성적으로 무척 개방적인 시대에 살았는지도 몰라요
      아무튼 성적으로 개방된 신라에는 이런 노래가 또 유행했지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주겠는가?. 하늘을 받칠 기둥을 찍어내려 한다네." 
      좀 야한 상상을 할수 있게하는 노래 였지요
      '자루 빠진 도끼'는 여자의 음부를 은유한 것이고
      '하늘을 받칠 기둥'은 발기한 남자 성기가 떠오르지 않는지요?
      원효대사가 지었다는 이 노래는 그야말로 역사적 명곡이지요 
      요석공주를 '꼬시기' 위해 유행시킨 이 노래는 운우지정을 나누고 싶은 자신의 속내를 
      무열왕에게 알리는데 성공한 원효는 요석궁과 가까운 문천교에서 궁리(宮吏)와 부딪혀 
      일부러 물에 빠지고 옷을 말린다며 요석궁에 옮겨져 과부가 되어 홀로 지내던 요석공주와 
      자연스럽게 정분을 나누게 되었지요
      그리하여 설총(薛聰)이라는 대 문장가를 탄생시키게 되었어요 
      그 외에도 그 유명한 신라의 명장 김유신도 김춘추에게 자신의 두 여동생을 시집보냈으며
      진성여왕 또한 자신의 삼촌(위증)을 정부로 삼았지요
      이렇듯 신라 시대에는 우리가 상상도 할수없는 성적으로 개방된 시대였는지도 몰라요
      오늘은 날씨도 덥고해서 잠시 더위를 잊기위해
      총명한 여자들의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았어요
      -* 언제나 변함없는 녹림거사:조동렬(일송) *-
      
      


      ▲ <선덕여왕>애인 용수



      ▲ <선덕여왕>남편흠반(欽飯)



      ▲ <선덕여왕>두번째 남편 을제(乙祭)



      ▲ <선덕여왕>의 애인들 용수,용천 형제


 


'명인 · 고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실궁주(美室宮主)와 명기(名妓)  (0) 2016.08.18
망 부 석  (0) 2016.08.14
님은 아니 오시나이까   (0) 2016.07.24
동방의 지혜있는 민족  (0) 2016.07.14
상원사 동종  (0) 2016.07.11